캐서린 하워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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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 1520년에서 1525년 사이 출생 ~ [[1542년]] [[2월 13일]])는 [[헨리 8세]]의 다섯번째다섯 번째 왕비(재위 1540년 - 1542년)였다. 네번째네 번째 왕비 [[클리브즈의 앤]]의 시녀로 있다가 헨리 8세의 눈을 사로잡았다.
 
캐서린 하워드는 성격이 경솔하고 천진했다. 명문 하워드가의 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 에드먼드 하워드는 항상 빚에 쪼들렸다. 캐서린 하워드는 헨리 8세의 다른 왕비들과 달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엄하게 감독 하는 사람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50세가 다 되어가는 왕의 눈에 띄었을 때 그녀는 아직 십대 후반의 어린 소녀였다.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간통죄로 참수당했던 [[앤 볼린]]은 그녀의 외사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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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 헨리 8세와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식을 올렸다. 캐서린은 왕비로 정식 즉위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중년의 헨리 8세는 어린 캐서린 하워드를 "가시없는가시 없는 장미"라고 부르며 유난히 총애했다. 왕은 그녀에게서 왕자를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아버지뻘인 왕에게 경외어린 애정을 품었다.
 
그러나 캐서린은 [[클리브스의 앤]]의 시녀 신분으로 궁정에 오기 전, 음악교사 매녹스과 물의를 빚었고 서기관 프란시스 더햄과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공공연히 잠자리를 가진 전력이 있었다. 또 헨리 8세의 눈에 띄기 전에는 왕의 시종 토머스 컬페퍼를 사랑했다. 캐서린 하워드는 왕비가 된 후에도 컬페퍼에게 공공연히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매녹스를 궁중 음악가로 프란시스 더햄을 개인비서관으로 임명해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친지들에게는 뇌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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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겁에 질려 사실을 실토했다. 만약 더햄과 과거에 약혼했음을 인정하면 왕과의 결혼이 무효가 되어 간통죄에서 풀려날 기회가 있었으나, 공포에 질린 캐서린은 끝내 약혼 사실을 부인했다.
 
[[사권박탈법]](a bill of attainder)에 따라 사형이 확정되자 캐서린 하워드는 방에서 처형대로 올라가 목을 내미는 순간을 여러번여러 번 연습했다고 한다. 1542년 2월 13일, 캐서린 하워드는 참수되었다. 그녀의 유언은 "왕비로 죽지만 차라리 컬페퍼의 부인으로 죽고 싶었다"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543년, 헨리 8세는 여섯째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아]]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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