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61번째 줄:
=== 민족 분열 통치기(문화 통치기, 1919년 ~ 1931년) ===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기술 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의 급격한 공업화로 인한, 일본 내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어 한반도의 미곡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증산되는 양보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높아져 한반도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거기다 증산 비용을 소작 농민에 전가하여, 총독부가 식민지 지주를 옹호하는 등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어 갔다. 이 계획은 1930년대 초반 일본 내부의 쌀 공급 과잉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30년대 후반 대륙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다시 재개되었다.
=== 민족 말살 통치기 (1931년 ~ 1945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