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곡 다장조 (베토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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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자인 에스테르하지 공은 미사곡의 내용을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반면, 동시대의 비평가 [[E. T. A. 호프만|E.T.A. 호프만]]은 "어린아이 같은 고요한 마음의 표현"을 높이 평가했고, 마이클 무어는 "솔직함과 감정적 내용"을 특필했다.
 
== 개요작곡 및 배경 ==
베토벤은 [[대위법]]을 그 분야의 권위자였던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 수하에서 배웠지만, 경력 후기에 이르기까지 [[종교 음악]]을 다루지 않았다. 1807년에 니콜라우스 에스텔하지 공로부터 위촉을 받은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카펠마이스터]]로서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섬긴 [[요제프 하이든|하이든]]이 확립한 전통을 확대하게 된다. 하이든은 1795년에 [[잉글랜드]]에서 귀국한 이후 에스테르하지 공의 성명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가족을 위한 매년 한 곡의 미사곡을 작곡하고 있었지만, 1802년에 건강의 악화를 이유로 이 학습을 중단한다. 베토벤은 하이든이 길러온 전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 강한 영향을 받아 그는 다장조의 미사곡을 작곡하기에 이르렀다. 베토벤은 에스테르하지 공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폐하께서는 위대한 하이든이 연주했던 무수한 걸작을 수중에 두고 익숙해지고 계신다고 해서, 전 몹시 떨면서 미사곡을 건네드릴 것이라는 취지를 말씀드립니다."
 
루이스 록우드는 이렇게 썼다: <blockquote>"에스테르하지 공의 위촉을 받자 베토벤은 하이든의 미사곡을 칭찬하면서 "독특한 걸작"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위촉주가 에스테르하지 공이라는 사실을 크게 넘어, "글로리아"의 스케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자작의 작곡 중에 하이든의 미사곡을 연구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 스케치에는 하이든의 《[[천지창조 (하이든)|천지창조]]》 "글로리아"로부터의 두 개의 패시지가 쓰여져 있다. 《천지창조》는 하이든의 후기 네 편의 미사 중 한 곡으로, 베토벤에게 있어 출판보를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blockquote>

== 초연 ==
초연은 1807년 9월 13일에 [[빈]]에서도 멀지 않은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대대의 저택에서 에스테르하지 공의 음악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연주가 어느 건물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능성이 높은 후보는 수많은 하이든의 작품이 초연된 베르크키르헤와 공이 주로 거주했던 에스테르하지 궁전의 교회 두 곳이다. 이때의 초연은 연습이 부족한 채로 행해졌다. 스톨츠퍼스는 "무대 연습이 만족스럽지은 상황이었다""라고 썼고, 더욱이 "합창대의 다섯 명의 알토 중 한 명 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다.
 
베토벤은 1808년 12월 22일의 연주회에서 본 미사곡의 "[[대영광송|글로리아]]"와 "[[상투스]]"를 지휘했다. 이 공연의 주안점은 《[[교향곡 5번 (베토벤)|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베토벤)|교향곡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베토벤)|피아노 협주곡 4번]]》, 《[[합창 환상곡]]》의 공개 초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