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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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다른 뜻|가평 전투 (1951년 5월)|1951년 4월 가평에서 영 연방군이 주축이 되어 중공군과 싸웠던 전투|1951년 5월 가평에서 미군이 중공군과 싸웠던 전투}}
 
{{전쟁 정보
|분쟁 = 가평 전투
|전체 = [[한국6.25 전쟁]]
|그림 = Kapyong South Korea 1952 (AWM HOBJ3147).jpg
|그림크기 = 320px
|설명 = 1952년 가평의 모습
|날짜 = [[1951년]] [[4월 23일22일]] ~ [[4월 25일]], [[1951년]] [[5월 26일]] ~ [[5월 27일]]
|장소 = [[경기도]] [[가평가평군]] [[북면 (가평군)|북면]] 목동리 및 이곡리 일대
|결과 =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1 ={{국기그림국기나라|유엔}} [[주한 영연방군]]
* {{국기|영국}}
* {{국기|뉴질랜드}}
* {{국기|오스트레일리아}}
* {{국기나라|캐나다|1921}}
* {{국기그림|미국|1912}} [[미국]]
* {{국기|대한민국|1949}}
* {{국기|미국|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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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1 =
{{국기그림|영국}} 브라이언 버크<br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 [[:en:Ian이안 Bruce Ferguson|브루스 퍼거슨]]<br />
{{국기그림|캐나다|1921}} [[제임스 스톤]] <br/ >
{{국기그림|미국대한민국|19121949}} 프렝크[[장도영]] 델리<br/ >
{{국기그림|미국|1912}} [[매슈 리지웨이]] <br/ >
{{국기그림|미국|1912}} [[제임스 밴 플리트]]
|지휘관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원유첸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덩위에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팽덕회
|병력1 ={{국기그림|영국}} [[제27보병여단]]
* {{국기그림|영국}} [[:en:Middlesex Regiment|미들섹스 연대]]
* {{국기그림|뉴질랜드}} 왕립포병여단[[뉴질랜드 포병 왕립연대|RNZA 제16야전연대]]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 [[:en:3rd왕립 Battalion,오스트레일리아 Royal연대 Australian Regiment제3대대|제3 RAR제3RAR]]
* {{국기그림|캐나다|1921}} [[패트리샤 왕녀공주 캐나다 경보병대경보병연대|PPCLI]]
{{국기그림|대한민국|1949}}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사단]] <br />
{{국기그림|미국|1912}} [[제5기병연대 (미국)|제5기병연대]]
{{국기그림|미국|1912}} [[제213야전포병대대 (미국)|제213야전포병대대]]
|병력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제20군
|사상자1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 94명47명 사상<br />
99명 부상
{{국기그림|캐나다|1921}} 33명
|사상자2 =최대 1,000명 사망
|사상자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1000~4000명 사상
}}
{{전역상자 한국6.25 전쟁}}
{{전역상자 중공군 춘계공세}}
 
'''가평 전투'''({{lang|en|Battle of Kapyong}},{{zh|s=加平战斗|p=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4월 23일부터22일부터 25일까지 [[유엔사령부]]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뉴질랜드, 구성된영국군 [[주한_영연방군|영국 연방군]]이 중화인민공화국의부대가 [[중국인민지원군]]과 [[가평군|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en:3rd Battalion, Royal Australian Regiment|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와 [[패트리샤 왕녀공주 캐나다 경보병대경보병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왕립포병여단이포병 왕립연대]], 그리고 미군 박격포 부대와 셔먼 전차 15대가 이들을 지원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7보병여단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했다. 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 동안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가평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캐나다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의전선에 있던 [[유엔사령부]]가 돌파되는뚫리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격렬한 전투 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 배경==
'''기적의 가평 전투'''({{lang|en|The miracle battle of Kapyong}},{{zh|s=奇迹之加平战斗|p=qíjì 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5월 26일부터 27일까지 미국 유타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240명의 장병들은 중공군 4000명의 공격을 막아내며 진지를 수호하였는데, 그 전투에서 적군 350명 전사, 830명 생포하면서 아군은 부상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는 기적의 전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는 세계 전사에 유례가 없는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승리의 전투이다. 미군이 수행한 이 가평 전투는 영 연합군의 4월의 가평전투와 구별하기 위해 "기적의 가평전투" 또는 "가평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 상황전황 ===
{{본문|6.25 전쟁|6.25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 서울 재탈환 및 중공군 4차 공세 실패 ===
유엔이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수행한 반격공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8군 (미국)|미국 제8군]]은 인민지원군을 [[킬러 작전]] 때 [[한강]] 북쪽으로 몰아냈고, [[리퍼 작전]] 기간인 3월 중순에는 서울이 탈환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은 38선 이북으로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ref>O'Neill 1985, p. 121.</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원수 (미국)|원수]] [[더글라스 맥아더]]와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경색된 관계는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게 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ref name=ONeill123/> 뒤이어 1951년 4월 14일, [[제임스 밴 플리트]]가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미국 제8군과 주한 유엔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날 리지웨이는 맥아더를 대체하기 위해 도쿄로 날아갔다.<ref name="ONeill132"/> 한편 공세는 일련의 짧은 공격들로 지속되었다. 3월 말 시행된 [[코리지어스 작전]]에서 유엔군은 38선으로부터 8km 남쪽인 벤튼선까지 진출했고, 4월 초의 [[러그드 작전]]에서는 38선 바로 위쪽인 캔자스선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 제8군은 4월 중순 유타선까지 진출했다.<ref name=ONeill125_127>O'Neill 1985, pp. 125–127.</ref>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국군|국군]]이 [[서울특별시|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 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군|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 열세는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다.
 
[[매화산 전투]] 이후 유엔군이 꾸준히 북진하면서 [[제27보병여단]]은 미국 [[제9군단 (미국)|제9군단]]의 예비군으로서 복무했다.<ref name=Horner444>Horner 1990, p. 444.</ref> 1951년 4월, 여단은 1개의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1개의 캐나다 대대, 그리고 2개의 영국 대대를 합한 총 4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 [[아르길 서덜랜드 하일랜더즈]] 제1대대였다. 여단장 [[배질 코드]]가 3월 23일 특별 배려로 홍콩으로 떠났기에, 여단은 현재 [[브라이언 아서 버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 name=ONeill123>O'Neill 1985, p. 123.</ref> [[뉴질랜드 포병 왕립연대]] 제16야전연대가 88mm [[오드넌스 QF 25파운더]] [[야전포]]로 제27보병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ref name=Breen12>Breen 1992, p. 12.</ref><ref name=Butler103>Butler, Argent and Shelton 2002, p. 103.</ref>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이안 브루스 퍼거슨]]의 지휘 하에 있었다.<ref>Butler, Argent and Shelton 2002, p. 77.</ref>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이 무렵 [[제임스 스톤]]이 지휘했다.<ref>O'Neill 1985, p. 107.</ref> 중앙 구역에 배치되었던 여단은 미국 제9군단의 일부였으며, 제9군단에는 [[제24보병사단 (미국)|미국 제24보병사단]],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 (대한민국)|제2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미국)|미국 제7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보병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9군단의 군단장은 소장 [[윌리엄 M. 호지]]였다.<ref name=ONeill134>O'Neill 198, p. 134.</ref><ref>Varhola 2000, pp. 88, 278.</ref>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主攻: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력부대를 침)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특별시|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助攻: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파일:C Company 3RAR occupying Hill Salmon 16 April 1951 (AWM P01813).jpg|섬네일|right|150px|제3RAR이 1951년 4월 16일 "샐먼"에 있는 중공군 참호를 점령하고 있다.]]
중공군은 5차 공세에 약 27만명과 북한군 약 3만5천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특별시|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다.
이 무렵 제27여단은 미국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3월 말 조종암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여 3월 31일 벤튼 선에 도달했다. 여단은 이후 제9군단과 함께 [[가평천]]의 좁고 깊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10km 진격했다.<ref name=ONeill125>O'Neill 1985, p. 125.</ref> 4월 3일부터 제27여단은 러그드 작전의 일환으로 12일 동안 강을 따라 30km를 진격했다. 비록 이 계곡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지키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덕 꼭대기에 숨어든 소규모 보병 집단이 능수능란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4월 8일 여단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캔자스 선"에 도달하는 동안, 측면 언덕과 능선을 따라 전진하면서 연이어진 진지를 점령했다.<ref name=ONeill125_127/> 4월 11일 맥아더가 해임된 다음 날, 짧은 작전 휴식을 취한 후, 유타선을 향해 여단은 5km 진격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저항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여단의 초기 목표는 4월 13일이 되어서야 미들섹스 연대가 점령하였다.<ref name=ONeill127>O'Neill 1985, p. 127.</ref>
 
유타선을 향한 접근로는 900m 고지 2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사딘 고지가 1km 북쪽에 있었고, 샐먼 고지가 800m 더 북쪽에 있었다. 미들섹스 연대는 4월 14일 사딘 고지를 여러 차례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격퇴당했고,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에게 이 임무가 넘어갔다.<ref name=ONeill127/> 제3대대의 A 중대는 산마루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민지원군 10명이 죽고 20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8명이 부상을 입었다.<ref name=ONeill128>O'Neill 1985, p. 128.</ref> 다음 날 아침, 제3대대 C 중대가 가벼운 저항 속에 사격 한 번 없이 샐먼 고지를 점령했다. 고지 점령 후 중국인민지원군이 포격을 가해 오스트레일리아군 2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후 공습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반격 시도를 저지했다.<ref>Breen 1992, p. 20.</ref> 한편,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우측으로 진격을 계속해 4월 15일 795고지를 점령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연이은 진지에서의 활발한 지연 행동에 직면한 캐나다군은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최종 목표였던 826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ref>O'Neill 1985, pp. 128–129.</ref>
=== 중공군 5차 공세 시작 ===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국군 및 연합군의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실시한 후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중공군 대군이 서부전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각 9개 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兵團:국군의 야전군과 비슷함)은 [[개성]]-[[문산]] 축선에서 [[대한민국 1보병사단|국군 1사단]]과 [[제29보병여단|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은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군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특별시|서울]]을 포위하려 하였다.
 
== 서막 ==
=== 국군 6사단의 후퇴 및 위기 ===
=== 중공군 춘계공세 ===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군 조공이 공격하기로 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의 사창리였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군 9군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뒤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은 사창리를 돌파하여 중부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에 [[가평]]일대에 집결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은 부대원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파손된 상태였다.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본문|중공군 춘계공세}}
[[파일:중공군과의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국군 1.jpg|섬네일|left|1951년 4월 중공군과의 [[설마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유타선에 도달한 이후, 제27보병여단은 4월 17일 전선에서 물러난 뒤, 해당 지역을 대한민국 제6사단에 인계했다. 버크는 이후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주요 도로에 있는, 이전에 파괴되었던 마을 [[가평읍|가평]] 북쪽의 예비 진지로 이동할 것을 대대에게 명령했다.<ref>O'Neill 1985, p. 129.</ref> 정보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새로운 공세가 임박했음을 알려주었고, 여단이 예비진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이들은 3시간 전에 제9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다.<ref name=ONeill131>O'Neill 1985, p. 131.</ref> 지난 7달 동안 연속적으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영국군은 예비군 기간 동안 여단의 대부분을 쉬게 할 예정이었다. 아르길 대대와 미들섹스 대대는 홍콩에서 오는 새로운 2개 대대로 대체될 예정이었고, 버크와 제27여단 본부는 4월 말 여단장 조지 테일러와 [[제28보병여단]]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전쟁에 대한 캐나다의 지원 증대의 일환으로, 캐나다군은 5월에 새로 창설된 [[제25보병여단 (캐나다)|제25캐나다보병여단]]으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여단 본부 선발대와 아르길 대대는 4월 19일 서울을 떠나 홍콩으로 출발할 예정이었고, 남아있는 영국군 대대는 2주 후에 떠날 예정이었다.<ref name=ONeill131/><ref name=Breen18>Breen 1992, p. 18.</ref>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전환되지 않고 전쟁 전 기간 동안 여단의 일환으로 남아있을 예정이었고, 대신에 독자적인 보충 체계를 운용했다.<ref name=ONeill131/><ref>Breen 1992, p. 21.</ref>
 
한편, [[철의 삼각지대]]로의 진군 작전이었던 [[돈틀리스 작전]]에 대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철의 삼각지대는 남쪽의 [[철원군]]과 [[김화군]], 그리고 북쪽의 [[평양직할시|평양]] 사이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중요한 군사집결지이자 통신연결점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계획에는 미국 제8군이 연이은 진지에 지연 작전을 수행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의 또 다른 공세를 예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ref name=ONeill131/>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포병부대와 병참체계의 가시적인 강화를 포함하여 공산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추가적인 징후로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에게 ''와이오밍선''을 넘어서 공격을 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있었던 리지웨이는 공세의 규모를 넓혀 동부 구역에 '앨라배마선'이라는 제2차 목표선을 지정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4월 21일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 다음 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더 강력한 공세를 마주해야 했다.<ref name=ONeill132/>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글로스터 고지 전투]]에서 [[대한민국 1보병사단|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중공군이 이 구멍을 통해서 경춘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면 [[서울특별시|서울]]은 다시 공산군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성공되어 공산군의 승리로 될 위기였다.
 
[[파일:Disabled Centurion tank at Imjin (AWM HOBJ2237).jpg|섬네일|right|200px|영국 [[센추리온 (전차)|센추리온 전차]]가 1951년 4월 말 [[설마리 전투]]에서 파괴된 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바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이다.
[[중공군 춘계공세]] 또는 중공군 제5차 전역은 한강 북쪽에 있는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공세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집단군 3개(제3집단군, 제9집단군, 제19집단군)와 조선인민군 군단 3개([[제1군단 (조선인민군)|제1군단]], [[제3군단 (조선인민군)|제3군단]], [[제5군단 (조선인민군)|제5군단]]이 참여했으며, [[펑더화이]]가 이들 부대의 총사령관이었다.<ref>Farrar-Hockley 1995, p. 109.</ref><ref name=zhang145>Zhang 1995, p. 145.</ref><ref name=cmsa309>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2000, pp. 309, 326.</ref><ref group=note>중국군은 1950년대에 "사령관"과 "주석"을 제외한 군 계급이 없었다.</ref>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기 때문에, 4월 22일에 공세가 개시되었다. 미군 제1군단이 점령한 서부 지역의 [[임진강]]을 도하하는 주 공격에는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337,000명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차적인 임무에는 149,000명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임무는 더 동쪽의 [[소양강]]을 건너 미국 제9군단 대부분과 [[제10군단 (미국)|미국 제10군단]] 일부에 소속된 중앙 및 동부 구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ref name=Coulthard263>Coulthard Clark 2001, p. 263.</ref> 여기에 214,000명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세를 지원했다. 총 700,000명 이상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ref name=ONeill132>O'Neill 1985, p. 132.</ref> 준비의 일환으로, 전투에 단련된 제13집단군의 제39군과 제40군은 [[쑹스룬]]이 지휘하는 제9군집단 휘하 부대로 전환되었고, 제40군 사령관 원유첸은 가평에서 임진강으로 향하는 유엔군 증원군을 막는 한편, 대한민국 제6사단을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ref name=cmsa312>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2000, p. 312.</ref><ref group="note" name=nomenclature>중국의 군사 용어에서 "군" (军)은 [[군단]]을 의미하며, "집단군" (集团军)은 [[야전군]]을 의미한다.</ref>
 
152,000명의 대한민국 국군, 245,000명의 미군, 11,500명의 영연방군, 그리고 기타 유엔 회원국에서 온 병력 10,000명을 포함한 418,000명의 유엔군이 공세를 맞닥뜨렸다.<ref name=ONeill132/> 그러나, 미국 제8군이 전선을 따라 대규모 침투를 막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 보병 상당수가 유엔군의 측면을 휩쓸고, 유엔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전체 부대들을 포위했다.<ref>Johnston 2003, p. 89.</ref> 제1군단 구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주요 공격로에 놓여있었던 부대는 [[제29보병여단]]이었다. 임진강에 주둔한 여단은 이틀 동안 중국인민지원군 2개 사단을 저지하여 서울 점령을 막았지만, 영국군의 전쟁 중 가장 참혹한 교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 중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의 대부분은 [[설마리 전투]]에서 완강한 저항으로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대대의 지휘관 [[제임스 카네]] 중령은 그의 대대가 포위된 이후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다.<ref>O'Neill 1985, pp. 133–134.</ref> 결국 제29여단은 캔자스선을 방어하는 중에 1,09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약 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스터셔 연대의 손실은 영국과 유엔 사령부 내에서 논란을 야기했다.<ref>Johnston 2003, pp. 90–91.</ref> 한편, 더 동쪽의 제9군단 구역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제40집단군]] 제118사단과 [[제20집단군]] 제60사단이 4월 22일 밤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ref>Mossman 1990, p. 401.</ref>
=== 영연방 27여단의 참전 ===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다. 후퇴하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 전투 ==
이 전투에서 [[제27보병여단|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오스트레일리아|호주]]군 대대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 대한민국 국군의 붕괴 ===
{{본문|사창리 전투}}
 
[[파일:3 RAR Korea (AWM P01813-449).jpg|250px|섬네일|1951년 3월 1일 587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614고지에서 이동 중인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C 중대. 이들은 가평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본진인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의 3대대는 [[가평군|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다.
대한민국 국군은 가평천 계곡 북쪽 끝의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으며, 제27여단을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10km 진격했다.<ref name=ONeill134/>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이 예상되자, 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오후 4시에 공세를 멈추고 2개의 선발 연대였던 제19보병연대와 제2보병연대에게 협력하여 방위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한편 [[제7보병여단|제7보병연대]]는 선발 연대 바로 뒤쪽에서 예비 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Mossman382>Mossman 1990, p. 382.</ref><ref name=kimh630/> 방어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았던 대한민국 국군은 뉴질랜드군 야포와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의 [[M101 105mm 곡사포]] 지원을 받고 있었다.<ref name=Horner69>Horner 2008, p. 69.</ref><ref name=Mossman402>Mossman 1990, p. 402.</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중지한지 1시간이 지나 방어시설을 구축했지만 대한민국 국군 선발부대는 일련의 고지 지역만 점령하고 계곡과 측면을 노출시켰다.<ref name=kimh630>Chae, Chung and Yang 2001, p. 630.</ref> 중국 제118사단과 제60사단이 오후 5시에 대한민국 국군을 공격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 허술하게 구축한 방어 지점들을 여러 곳에서 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ref name=kimh630/> 모든 전선에서 압박을 받자, 대한민국 국군은 곧바로 거의 모든 지역을 내주고 돌파당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무기, 장비, 차량을 모두 버렸으며, 흩어진 채 산과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다. 오후 11시에 장도영은 그의 모든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ref name=Johnston91>Johnston 2003, p. 91.</ref> 다음 날 오전 4시, 뉴질랜드군은 손실을 막기 위해 철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이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뉴질랜드군은 다음 날 아침 미들섹스 연대를 방어군으로 삼고 계곡 쪽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가 지자 대한민국 국군이 사실상 붕괴되었음이 명백해졌고, 뉴질랜드군은 다시 철수했다.<ref name=Horner69/><ref name=Johnston91/>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군|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대한민국 6보병사단|제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공헌하였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다.
 
한편, 미국 제1해병사단은 동쪽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의 철수로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ref name=Johnston91/>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과 제40군은 제1해병사단의 반격 가능성으로 인해 제9집단군의 오른쪽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만 맡았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고, 미군은 비교적 덜 공격받게 되었다.<ref name=Johnston91/><ref name=Zhang149>Zhang 1995, p. 149.</ref> 그러나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 구역의 유엔군 전방진지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부대 사이에 틈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점차 방어하기 어려워졌고, 밴 플리트는 아침 중반에 캔자스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는 곧이어 미국 해병대에게 [[북한강]] 뒤쪽의 [[파로호|화천호]]와 대한민국 제6사단이 점령한 새 지점 사이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형성할 것을 명령했다. 호지의 계획은 대한민국 국군의 재편과 약간의 저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2,500명의 후위 부대가 조금 늦게 진지를 구축했지만 전혀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ref>Johnston 2003, pp. 91–92.</ref> 돌파를 우려한 호지는 4월 23일 대한민국 국군이 위치를 고수하지 못할 것에 대한 예방으로 제27여단에게 [[가평군|가평]]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고, 제27여단에게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핵심 도로이자 중요한 보급로였던 17번 도로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로 이어지는 연결로 2개를 막는 임무를 주었다.<ref name=Horner69/><ref>Mossman 1990, p. 391.</ref>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제1차 춘계공세시에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국군|국군]]과 유엔군은 노네임선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되었다.
 
제27여단은 아르길 연대가 전투 직전에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3개 대대로 줄어들었다. 미들섹스 연대 역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비부대가 된 상황이었다.<ref name=Horner68>Horner 2008, p. 68.</ref> 또한 계곡의 폭 때문에 지속적인 선형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버크는 이용 가능한 2개 대대를 양쪽의 고지에 배치해야 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강 동쪽의 504고지를 점령했으며,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제2대대는 서쪽의 677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북서쪽에 있는 약 800m의 수덕산은 필요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이 3개의 고지들은 강력한 자연방어진지를 형성했고, 주요 공세를 막는데 안성맞춤이었다.<ref name="AWM">{{웹 인용|title=The Battle of Kapyong, April 1951|publisher=The Australian War Memorial|url=http://www.awm.gov.au/encyclopedia/kapyong/doc.asp|access-date=23 January 2010}}</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단 진지는 측면 보호 없이 노출되는 등 여러 가지 결함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미들섹스 연대는 포를 가지고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중부 구역은 점령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여단은 포격 지원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이 2개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한다면, 선발 중대들은 지원이 없는 상황이 될 것이었고, 차단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용인해야 했다. 특히 계곡의 노출된 중앙 지역을 통해 4km나 되는 통신망을 가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가 특히 공격에 노출될 수 있었다.<ref name=AWM/>
== 미군 213 야전포병대대, 기적의 가평 전투 ==
 
각 대대는 분리된 중대 규모의 방어진지에 산 정상과 산골짜기를 따라 배치되었고, 7km의 강력한 방어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방어해야 할 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각 중대는 넓게 퍼져 있었고,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 대신 각 분대가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각 중대는 사주 방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여단 본부는 4km 남쪽에 떨어진 계곡에 있었다.<ref>Horner 2008, pp. 69–70.</ref> 뉴질랜드 포병 부대가 여전히 대한민국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방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제9군단은 B중대의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 105mm 곡사포 포대와 12개의 M2 4.2인치 박격포, 제2화학박격포대대를 제27여단에 배정했다. 미국 제72중전차대대 A중대에서 온 15대의 [[M4 셔먼]] 역시 지원 부대로 배정되었다.<ref name=Breen12/><ref name=Butler103/>
1951년 5월 말에 경기도 가평지역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던 무렵, 미국 유타주 시더 시티에 본부를 둔 그 지역 출신의 장병들 600명으로 구성된 미국 유타주 방위군 213 야전포병대대는 당시 가평에서 한국군과 미군24보병사단 21보병연대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당시의 작전 지역은 가평군 북면 화악리 움터마을 뒤 공터(상홍적리)였다. 당시 포대가 지원하던 한국군은 아무런 통지 없이 후방으로 이동하였고, 공격 중이던 보병부대가 중공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전진 이동하자 보병의 엄호 없이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보병부대에 포위된 것을 알게 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원수) 소속 4,000명의 중공군들은 5월 26일 밤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협곡인 몽골과 드렁골 양쪽을 통해 본부 및 본부포대와 A포대의 240명이 지키는 진지로 진격해 왔다.
 
캐나다군은 곧 677고지를 점령하고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캐나다군은 6개의 [[비커스 기관총]]을 여러 구역에 나눠서 배치해서 종심부를 강화했고, 진지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방어 사격 전술을 사용했다.<ref>Johnston 2003, pp. 94–95.</ref> 한편, 오스트레일리아군은 504고지를 점령하였는데, D중대는 산 정상을, A중대는 북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산등성이를, 그리고 B중대는 강을 낀 작은 언덕을 차지했고, C중대는 산등성이 뒤쪽에서 예비부대로 남아있었다.<ref name=AWM/> 미국 미국 제9군단의 요구에 따라 퇴각하는 대한민국군을 통제하기 위해, 버크는 퍼거슨에게 죽둔리 마을 근처의 계곡의 낮은 지대에 사령부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보병 엄호 없이 고립된 240명의 장병들은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보급품에 의한 충분한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정찰대의 적의 움직임을 간파한대로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와 A포대장 레이 콕스(Ray Cox) 대위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필사적이고 조직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포위 당한 상태에서 밤새 포격과 백병전을 용맹스럽게 수행한 결과 진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105mm 곡사포의 근거리와 원거리 사격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근접 전투를 위해서는 신관을 0.5초로 설정하여 쳐 들어 오는 적들의 머리 바로 위에 터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퍼거슨의 상황 인식과 전투 통제 능력을 제한하고, 사령부를 침투에 노출시킬 수 있었다.<ref>Johnston 2003, p. 95.</ref> 오후에는 바위가 매우 단단하다고 판명된 곳에 땅을 파고 약간의 덤불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작은 사격호를 파는데 시간을 보냈다.<ref name=Coulthard263/> 불과 몇 시간 만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서둘러 방어 진지를 준비했지만, 포병 전방 관찰자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중대 진지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어 사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ref name=Horner70>Horner 2008, p. 70.</ref>
 
[[파일:American Sherman tank Battle of Kapyong 23 April 1951 (AWM P04953).jpg|섬네일|왼쪽|미국 M4A3E8 셔먼 전차가 1951년 4월 23일 전투 몇 시간 전에 가평에 도착했다.]]
동이트자 전투가 수그러들었는데, 이 때 이이블 포대의 지휘관인 레이 콕스 대위는 18명의 병사와 박격포 한문, 기관총 세 정으로 수색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을 수색했다. 본부포대의 고든 판스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양쪽에 9명씩 협곡을 통해 바로 올라갔고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적군이 사살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잔당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작은 협곡 안으로 나오자 중공군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여기서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판스워스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랐는데, 중공군 병사들은 총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단 한발의 사격도 없었다. 그 옆의 작은 협곡에는 중공군 98명이 있었는데 판스워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이 그들을 본부로 대리고 왔다.
미국 제72중전차대대 A중대의 중대장이었던 케네스 W. 코흐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분대를 파견했다. 504고지 동쪽 측면을 둘러가는 도로가 있었는데, 기갑부대를 파견하기에 딱 좋은 지역이었다. 5개의 전차로 구성된 1개 분대가 중국인민지원군이 도로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군 B중대 앞의 북쪽 전초기지를 점령했다. 또 다른 분대는 B중대와 함께 서쪽의 고지를 점령했고, 코치의 지휘전차는 대대 본부 근처에 배치되어 B중대에서 남쪽으로 약 800m 떨어진 가평천을 가로지르는 여울을 방어했다. 그러나 전차 부대는 현명하지 못하게도 보병 지원 없이 배치되었다.<ref name=AWM/>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국 기갑지원부대의 지휘계통도 복잡했는데, 미국 지원부대가 평상시처럼 지휘계통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코흐는 자신의 전투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6mm 주포와 [[M2 브라우닝]] 1정, [[M1919 브라우닝]] 2정으로 무장한 [[M4 셔먼]] 전차는 가공할만한 자산이었으며, 방어를 상당히 강화시켰다. 이에 대응해 중국인민지원군은 전차가 없었으며, 보병 부대가 약간의 3.5인치 대전차 로켓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ref>Breen 1992, p. 40.</ref>
 
오후 8시가 되자 수많은 대한민국 국군이 흩어진 채 여단이 고수하고 있었던 전선 사이의 틈으로 철수했고, 대부분의 국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 쪽으로 이동했다.<ref name=Horner69/> 대한민국 제6사단은 제27여단 뒤쪽 지점에서 재편했지만, 원래 병력의 절반으로 규모가 줄어든 상태였다.<ref name=Mossman402/> 제20군은 서울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주요 공세의 일환으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중국인민지원군 제118사단은 철수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뒤쫓으며 가평천 계곡을 따라 계속 진군했다. 북에서 동으로 난 계곡을 따라 진군한 중국인민지원군 제354연대는 오후 10시에 오스트레일리아군 지점에 도달했다.<ref name=Mossman402/><ref group=note>오닐은 중국인민지원군 제60사단으로 이 부대를 확인했다. 하지만, 제60사단은 제20군의 작전의 일환으로 남쪽에서 서쪽으로 공세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가평 계곡에서 대한민국 제19보병연대를 격퇴한 후 그 부대를 뒤쫓지 않았다. 사단이 마주한 그 다음 부대는 제1군단 구역에 있었던 미국 제24사단이었다. Mossman 1990, p. 402과 O'Neill 1985, p. 134를 참고하라.</ref> 가평 남쪽에 있는 17번 도로의 중요한 교차점을 점령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차단 지점의 위치를 거의 알지 못했던 중국인민지원군은 선봉 부대를 저지대에 두고 계곡 어귀에 섬처럼 솟아 있는 길고 낮은 남북의 능선에 접근했다.<ref name=Mossman402/>
=== 놀라운 전과 ===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전사 350명, 포로 830명의 엄청난 전과를 얻었는데, 놀랍게도 아군은 소수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 전사자는 한 명도 없는 기적을 이루었다. 5월 26일과 27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획득한 총기류들이 두 트럭 분량이었는데 이를 파괴시켰다. 부상자들을 보살피고, 중공군 포로들을 이동시키기 전에 전사자들을 정중히 매장했는데 일부 포로들이 이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완전한 일방적인 전과는 세계 전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적의 전과이다.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날의 승전을 '기적의 전투'로 부르며 큰 자부심과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가진다.
이 놀라운 전과로 같은 해 12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한국 보훈처는 2011년 5월 26일 이 장병들의 출신지인 유타주 시드시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자유의 매달을 전달하였다.
 
== 각주 ==
당시 한 부대원이 쓴 글은 책임자였던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 중령의 남다른 고뇌를 짐작하게 해준다.
{{각주}}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주었다. 몸무게 85kg에 갈색 머리였던 그는 일 년이 지나자 67kg에 백발이 되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대대의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였고, 우리 600명 전원은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내용주
프랭크 댈리 대대장은 아침마다 텐트 밖에 흰 깃발을 꽂아두고 깃발이 있을 때는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기도했는데, "그 시간이 최고 사령관인 하나님께 여쭙고 명령을 받는 시간"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참전 미군의 19개 포병대대 중에 대원이 한명도 전사하지 않고 전쟁을 마치고 귀환한 대대는 이 213 야전포병대대가 유일하다. 이 기적의 전투는 성경에서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시24:8)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호하신 사례와 같고(삿3:9, 3:15), 하나님께서 직접 적들에게 공포감을 주심으로(출 23;27, 신 7:20,23; 수 24:12), 적군들의 마음을 녹게 하고(수 2:11), 갈팡질팡하게 한(삿 4:15) 사례와 같다. 또한 몰몬경에서 힐라맨의 2000명의 용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워 적을 물리치고 전사자가 한명도 없었던 사례(앨마 56:56)와 같다.
{{각주|group=note}}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여러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전투를 치룬 213야전포병대대는 전쟁에 참여한 미국의 19개 포병대대 중에 한명의 전사자도 없는 유일한 부대이다.
 
=== 기적의 전투 기념 ===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참전 기념비가 59년 만인 2010년에 가로 1.4m, 세로 1.2m 크기로 새워졌다. 이 기념비는 당초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영연방참전비 입구에 세워졌다가 가평군 지원으로 2015년 11월에 북면 이곡리 카이저길 45-23으로 이전 설치되었고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회장 최승상)에서 관리하고 있다. 펼친 책 형태의 기념비에는 당시 전투상황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졌다. 이에 앞서 미국 유타 주 시다 시에는 2008년 9월 한국전 참전비가 세워졌다. 포대 진지가 있던 북면 화악리 움터마을 뒤 공터(상홍적리) 옆 도로변에도 이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전과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기적의 승리 요인 ===
213야전포병대대의 대대원들은 유타주 남부의 시더 시와 그 인근의 리치필드, 비버, 세인트 조지 출신이다. 이들은 당초 한국으로 파견된 독일의 부대를 대체하기 위해 독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들이 훈련한 결과 매우 정확하고 유능한 능력이 검증되어 한국 전쟁터로 배치되도록 변경되었다. 이들은 유타주 정착민들로서 미국 서부개척의 주역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일명 몰몬교) 교인들로서 18~23세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명예롭고 존경받는 농민, 교사, 상업인, 학부생, 석탄광산 노동자 등 직장인 들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돈독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기적의 승리는 그들의 전투력에 더하여 종교적 신앙의 영향에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조국의 부름을 받고 우방국의 자유를 위해 출병할 당시에 이 교회의 세인트 조지 성전장으로부터 "여러분이 성전 성약대로 의롭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생명을 잃지 않고 모두 무사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 성전장의 손자 중의 한명이 그 부대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적이 있는 대대 지휘관 Frank Dalley 중령은 신중한 계획과 많은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아침 그날의 활동을 계획하면서 혼자 시간을 내어 기도 했으며, 기도하는 시간에는 천막 밖에 흰색 깃발을 꽂았고, 깃발이 있을 때는 비상 상황이 아니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그는 그 시간에 최고 사령관인 하나님으로부터 명령 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이라고 말했다.
 
213야전포병대대의 A포대 통신중대 기록병이었단 글렌 오그덴은 승인으로서 조직적인 훈련과 신앙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와 그들 간의 차이점을 본다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적은 조직이나 지시, 훈련도 없었다. 우리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맡은 일에 아주 뛰어났다. 모든 것이 몇 번이고 연습한 것처럼 진행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님이 그곳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240명이 4000명의 군대를 무찌르고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가평의 기적은 영원한 유산 ===
2008년 9월, 신 더블유 성 한국 부총영사가 시더시티에 위치한 로터리 100 주년 참전 용사 공원에서 열린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 헌납식에 참석했다.
신 부총영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전쟁은 때때로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고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2009년 9월 가평군과 시더 시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는 문화적, 경제적, 교육적 유대를 함께 나누자는 합의이다, 가평군 관계자는 “시더 시와 시민들은 가평에서 벌어진 ‘기적의 전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이 참전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두 지역 간 교류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참전비 제막식은 2010년 10월 8일 오후 시더시에서 이진용 가평군수, 조 버지스 시다 시장, 참전 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11년 가평의 기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정부는 관계자를 파견하여 이들 주 방위군과 다른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시더시티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를 방문했고, 뒤이어 남유타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2시간 동안 오찬을 함께 했다. 국가보훈처 박종왕 국장은 ""오늘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평화, 번영, 자유는 여러분 군인들의 사심없는 희생과 공헌 위에 새겨진 것입니다. 한국은 영원한 빚을 졌고 앞으로도 양국간의 신뢰와 우정을 계속 쌓아 갈 것입니다." 라며, '60년의 헌신과 60년의 우정'을 연설했다.
 
=== 결과 ===
4월의 가평전투에서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제27보병여단|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으로 의해 패했지만 3일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의 길에 남는 거대한 전투의 장으로 변했고 이로써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5월의 가평전투에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213야전포병대대(몰몬 대대)는 자신들보다 17배나 많은 적군을 물리치고 엄청난 일방적 승리를 거두면서 아군의 인명피해는 한 명도 없었던 기적의 전과를 올렸다. 이는 성경에서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기사를 방불케 하는 기적으로서, 현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이로운 전과이다.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발생되지 않았고, 휴전을 추진하는 분위기로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황의 변화가 이어졌다.
 
== 이후 ==
[[캐나다]]에서는 가평 전투에서 승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위니펙]]에 위치한 부대 주둔지인 [[:en:CFB Winnipeg|CFB(Canadian Forces Base) Winnipeg]]을 'Kapyeong Barrack'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지 교민들은 통상 '가평부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2005년 캐나다군의 부대 통폐합 과정에서 [[:en:CFB Winnipeg|CFB Winnipeg]]에 주둔하던 육군병력들이 CFB Silo로 이동하고 위니펙 공항 인근의 제17비행단 주둔지가 새로운 CFB Winnipeg으로 명명됨에 따라 가평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가평부대'의 부지가 캐나다 연방정부와 원주민들간의 분쟁 대상이 되어 방치되어 있어서 여전히 현지 언론이나 주민들은 이 지역을 'Kapyeong'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CFB Silo내의 연병장 이름은 제2대대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Korea Parade Square'로 명명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평군|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고 있다. 4월에 '가평의 날(Gapyeong Day)'로 지정하여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자리잡고 전투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3대대는 '가평3대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262&aid=0000004896 호주 육군 가평대대를 아시나요?]</ref> 가평전투 60주년인 2011년, [[가평군|가평]]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려 당시 영연방 참전용사들과 이례적으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줄리아 길라드]] 현직 총리가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28432|제목=英연방 참전용사, 가평전투 60주년 기념행사|저자=우영식 기자|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3-04-24|확인날짜=2014-03-14}}</ref>
 
[[미국]] [[유타주]] 시더 시에서는 매년 5월 26일 가평 기적의 전투에 대하여 참전용사들과 시민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참전 용사들은 이제 90대의 고령으로 대부분 돌아가시고 몇 분 남지 않았다. 213야저포병대대는 남북전쟁 등 국내 전투와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이라크 파병 등에서 큰 공로를 세웠으며 현재는 222야전포병대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 같이 보기 ==
* [[글로스터 고지캐나다 전투 기념비]]
* [[영연방 참전 기념비]]
 
* [[가평의 날]]
== 관련 작품 ==
=== 대한민국 ===
* 《[[KBS]]스페셜-6.25기획, 허시 형제 이야기, 61년만의 해후》 : [[2012년]]작 다큐멘터리
* 《[[JTBC]]특집다큐, 6.25의 이방인》 : [[2013년]]작 다큐멘터리
 
=== 해외 ===
* 《Gapyeong》 : [[2011년]]작 다큐멘터리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4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s://web.archive.org/web/20140130133418/http://korean-war.commemoration.gov.au/korean/china-intervenes-in-korean-war/third-battalion-at-kapyong.php 호주의 한국전쟁 참전]
* [https://www.youtube.com/watch?v=F_Q4NE2ryFI 유튜브-6.25 Korea War Ga-Pyung Battle(가평지구전투)]
* [https://web.archive.org/web/20140318210836/http://koreanwar60.tistory.com/340 세대공감625]
*[https://kafs.or.kr/file/?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zY7fQ%3D%3D&bmode=view&idx=3627921&t=board 한미우호협회 기적의 전투]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01008/31705857/1 동아일보 기적의 전투 기사]
*[http://www.narasarang.kr/news/articleView.html?idxno=731 나라사랑 기적의 전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73212#home 중앙일보 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한국 전쟁}}
[[분류:1951년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1951년영국이 남북참가한 관계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캐나다가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1950년 분쟁]]
[[분류: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전투와 작전]]
[[분류:영국의뉴질랜드가 참가한 한국 전쟁전쟁의 전투와 전투작전]]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중화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전쟁의 전투와 전투작전]]
[[분류:뉴질랜드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전쟁의 전투와 전투작전]]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전쟁 전투]]
[[분류:캐나다의 한국 전쟁 전투]]
[[분류:1951년 4월]]
[[분류:가평군의 역사]]
[[분류:1951년 분쟁]]
[[분류:1951년 한국]]
[[분류:대한민국의 전투]]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