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다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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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은 [[에도 시대]] 말기 [[야마시로 국]] [[기이 군]] 후시미 (현재의 [[교토 시|교토교토시]] [[후시미구]])의 데라다야 여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다음 두 가지 사건을 ‘데라다야'데라다야 사건’으로사건'으로 부른다.
* [[1862년]](분큐 2년)에 발생한 [[사쓰마 번]] [[존황양이파]] [[지사]] 진압진압한 [[사쓰마번 지사 숙청 사건]].
* [[1866년]](게이오 2년) 발생한 [[후시미 구|후시미]] [[봉행]]에 의한 [[사카모토 료마]] 습격 사건]].
 
== 사쓰마 지사 숙청 사건 ==
[[1862년]] [[5월 21일]] 분큐 2년에 사쓰마 [[존황양이파]]가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이자 사실상 지도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에 의해 진압된 사건이다. ‘데라다야 소동’이라고도 한다.
 
1,000명에 달하는 번병을 이끌고 상경한 히사미쓰는 일본의 존왕파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사미쓰는 당시 막부를 타도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공무합체]]가 그 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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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히사미쓰는 질서를 중시하는 엄격한 성격으로 이미 [[사이고 다카모리]], [[무라타 신파치]], [[모리야마 신조]]를 포박하고 오사카에서 온 번의 시키도록 명령 숙청하고 교토 지사의 의도와는 전혀 정취를 달리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4월 13일에 후시미에 도착한 히사미쓰는 16일 입경하고 먼저 조정보다 지사 진압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이 열기에 경악했던 사쓰마 번의 과격파는 우국의 마음에서 쓰게하고 아리마 신시치, 시바야마 아이지로, 하시구치 쇼스케 등은 여러 번의 존왕파 지사, 마키 이즈미, 다나카 와치 통해 들과 공모하여 관백 쿠조 히사타다와 교토 소사대 사카이 다다아키를 습격하고 그 목을 가지고 히사미쓰에 받드는 것으로, 무리하게라도 봉기를 촉구하는 것에 결코했다. 이 습격하기 전에 근거지로하고 있던 사쓰마 번의 이십팔번 쪽방에서 나오고, 후시미의 선원 숙소 데라다야에 모이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당시 데라다야는 사쓰마의 정 숙소이며, 이러한 모의 관한 집결 장소로 좋은 장소였다 보인다.
 
지사 폭발의 소문을 듣고 있던 미츠는 측근의 오쿠보 도시미치, 가이에다 노부요시, 나라하라 키자에몬을 잇달아 파견하고 설득을 명 번사를 억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3일, 사츠마 영주의 저택에서 나가타 사이치로가 번복 궐기를 막으려고 했지만,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할복했다. 이에 따라 계획 결행 날짜가 다가온 것을 알았다 주한 번역 다카사키 마사카제, 후지이 료제츠(쿠도 서먼)의 두 사람은 급한 교토에 달려가 급히 보고했다. 히사미쓰는 놀라 출분 번사를 영주의 저택에 불러 스스로 칙지와 향후 정책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주군의 명령에 의한 토벌도 있다고 포함한 나라하라 키자에몬, 오야마 쓰나요시, 미치지마 고로베, 스즈키 유에몬, 스즈키 쇼노스케, 야마구치 긴노신, 에나츠나카 사에몬, 모리오카 마사즈미 특히 검술이 뛰어난 무사 8명을 진압 사용에 선택 파견하기로 했다. 나라하라 키자에몬, 미치시마, 에나츠, 모리오카의 관도를 오야마, 스즈키, 야마구치가 다케다 가도를 진행했다. 나중에 꼭대기층 겐스케 지원해 더해져 총 9명이 되었다. --->
 
[[분류:막말의 사건]]
[[분류:막말]]
[[분류:막말의 교토]]
[[분류:사쓰마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