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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기의 대학원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를 조금 지나는 기간 동안 주로 [[도시 계획]]의 연구·업무에 종사하였다. 인구밀도나 교통현상, 도시 디자인 등의 연구를 계속하여 그 성과를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본건축학회에 발표하여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1959년 박사칭호(博士号) 학위 논문 〈도시의 지역구조와 건축형태〉(都市の地域構造と建築形態)로 정리해 내놓는다. 또한 1946년 8월 도쿄대학 조교수에 취임하여는 [[후쿠시마시]]의 의뢰에 따른 후쿠시마 지구 도시계획과 [[다치카와 비행장|다치카와 기지]] 적지(跡地)의 문화도시설계,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의 도시계획(1950년에서 52년까지) 따위에 손을 댔다. 그 와중에 1948년에는 〈건축을 둘러싼 제문제〉(建築をめぐる諸問題), 이태 후 1950년에는 [[경제안정본부]] 자원조사회 사무국 지역계획반의 의뢰에 따라 〈지역계획의 이론〉(地域計画の理論)이라는 2개의 계획관련 연구 소논문을 집필하고 있었으며, 전재 부흥사업의 일환으로 행하여진 도쿄도 도시계획경기 및 문교도시계획, 1947년부터 [[전재부흥원]](이후의 [[건설성]]. 현재의 [[국토교통성]])에 따른 각지의 [[전재부흥도시계획]]에 참가하였다. 당초에 담당했던 것은 [[군마현]] [[마에바시시]]와 [[이세사키시]]였다.<ref>[[#丹下健三・藤森照信2002|丹下健三・藤森照信2002]]、118-127頁。</ref>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1948년1945년 8월 6일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길에 올랐으나 잿더미로 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생가에 도착한 이튿날 7일, 아버지는 이미 2일에 타계한 것과,<ref group="注">[[단게 겐조#丹下健三1997|丹下健三1997]], 41쪽에는 "향리에서 '부친 돌아가심(チチシス)'의 전보가 왔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단게 겐조#丹下健三・藤森照信2002|丹下健三・藤森照信 2002]], 112쪽의 단게의 인터뷰에서는 "8월 2일이었던가, 친부가 이마바리에서 위독하다는 알림을 받았습니다."고 되어 있다.</ref> 또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히로시마에 대한 원폭투하]]와 같은 날에 실시된 이마바리시를 향한 공습으로 인하여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 역시 동시에 돌아갔음을 알게 된다. 궤멸적 피해를 당한 히로시마는 외국의 잡지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소비에트 팰리스 계획안<ref group="注">소비에트 팰리스(모형)의 그림. [http://www.arth.upenn.edu/spr01/282/w6c2i29.htm Penn History of Art "Le Corbusier, project for the Palace of Soviets Competition, 1931."]</ref>을 만나 건축가를 지망하게 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 히로시마의 부흥계획이 전재부흥원에서 도마 위에 올랐음을 알고 잔류방사능의 위험성이 저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네는 지원하여 담당을 신청한다.<ref>[[#丹下健三1997|丹下健三1997]]、62頁。</ref> [[아사다 다카시]], [[오타니 사치오]]를 비롯한 동대의 연구실의 스태프들과 더불어 1946년 여름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도시계획업무에 종사하였다.<ref>[[#丹下健三2011|丹下健三2011]]、248-249頁。</ref> 그 성과는 히로시마시 주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콘페에 참가했을 때 훌륭히도 1위에 입선하는 형태로 결실된다.
 
다른 설계안이 공원 안만을 고려한 설계안에 그친 데 비하여 단게는 히로시마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평화대로]](폭 100 m, 길이 4 km에 이르는 통칭 100 미터 도로)와 직교하는 남북축선상에 위령비와 [[원폭 돔]]을 자리시켜, 그 계획안의 도시적 스케일이 콘페에서 높이 평가되었다.<ref>[[#丹下健三・藤森照信2002|丹下健三・藤森照信2002]]、139-143頁。</ref> 히로시마 부흥계획에 있어 이 시가지를 십자형으로 관통하는 도시축을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히로시마시의 골격을 세운 것은 단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f>[[#丹下健三・藤森照信2002|丹下健三・藤森照信2002]]、142-143頁。</ref> 또한 이로써 당시에 단순히 일개 폐허에 불과했던 원폭 돔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중심성을 가진 도시공간으로서의 히로시마를 재건한 결과 랜드마크로서의 '원폭 돔'을 발견한 것은 사실상 단게라고 해도 괜하지 않다.<ref>[[#井上章一2006|井上章一2006]]、297-298頁。</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