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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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는 [[1세기]] - [[9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 삼국시대고대 국가의 성립 ===
{{본문|삼국시대}}
[[파일:Ddol-mangB.jpg|thumb|220px|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허리띠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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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신라를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 중세 (고려) ==
{{본문|고려}}
[[파일:Korea-Goryeo celadon-Incense burner-01.jpg|thumb|200px|고려의 청자칠보투각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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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 근세 (조선) ==
{{본문|조선}}
[[조선]]시대는시대의 전기는 근세에 해당된다.<ref>[http://www.korean.go.kr 국립국어원]</ref>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 역사 ===
==== 전기 ====
===== 개국과조선의 왕자의 난개국 =====
[[파일:Taejo of Korea.jpg|thumb|left|200px|[[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영정.]]
[[1392년]] 이성계의 5남인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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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파일:Statue_Sejong_le_Grand.jpg|thumb|left|[[세종대왕]] 동상]]
 
조선의 개국과 제도 정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고려 사회에서 그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여종이었던 탓에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아왔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회가 고려보다는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길을 원하였다.또 그는 향리 출신의 신진 사대부로서, 고려의 지방 세력가의 백성에 대한 자의적 지배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회가 합리성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사회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무절제한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조선 사회는 신분 위주의 [[음서 제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 제도]]가 관리 등용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지방의 향리를 단순한 [[아전]]으로 격하하고,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고려의 속현·속주·향·소·부곡 등을 폐지하게 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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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
 
 
 
 
== 근대 태동기 (조선 후기) ==
 
=== 근대역사 ===
 
==== 후기 ====
 
===== 붕당 정치의 변질 =====
===== 정치 구조의 변화=====
{{본문|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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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 근대 ==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로 본다.
=== 조선 말기 ===
==== 개화와 주권 수호운동 ====
=====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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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 근대 ==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로 본다.
 
=== 대한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