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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 계획의 핵심은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만주국으로 정착케 하여, 유대인의 자본을 만주국건설에 사용하고, 아울러 일본본국에 대한 자본유입을 실현하도록 미국(특히 유대계 미국인)을 설득하는 데 있었다.
 
입안자들은 유대인의 이주및이주 및 투자획득의 방법에 관한 풍부한 안들을 제시하였다. '유력 유대인을 이용하여 미 대통령및대통령 및 그 측근의 극동아시아정책을아시아정책을 일본제국에 유리한 쪽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라는 긴 제목을 가진 계획서가 그것이다. 1939년 6월에 제작된제안된 이 보고서는 동년 7월에 '유대자본도입에 관한 연구와 분석이라고분석'이라고 개칭되어 정부에 제출된 후에 승인을 받았다.
 
계획서에서는 유대 사회와 미국, 이 쌍방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즉, 미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 유대교와 신토와의 유사점을 미국의 랍비에게 소개하기 위해 또 유대인과 유대교를 일본인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랍비를 일본에 초빙 하는 것 등이다. 동시에 이 계획은 미국의 신문·영화 업계(유대인에유대인들이 의해 지배되고지배하고 있다고 입안자들은 믿고 있었다)를 끌어들이는 것도 제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서 내용의 대부분은 이주 계획에 할애되었다. 상하이 근교의 여러지역이나, 만주의 많은 지역이 이주예정지로 제시되었다. 입안자들은 유대안 이민의 인구를 1만 8천명에서 60만명에 이를 것이라 추측했다. 각각의 상정 인구 규모에 맞춘,[[학교]] ,[[병원]] 등의 인프라 정비, 거류지의 면적에 관한 상세한 대비자료도 제시되었다. 이러한 이주지에서 유대인에게 문화·교육면의 자치에 더하여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기로 계획자등의 사이에 합의되었다. 일본인은 유대인에게 과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는 그들의 호의와 경제적 혜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유대인 거류지는 얼핏 자치국가와 같이 보이지만, 유대인을 은밀하게 감시하기 위한 통제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이 계획을 승인하도록 정부에 요청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시온 의정서]]"에 의해 여러 나라에서 실시한 것처럼) 지배권을 장악 하여, 일본의 정치 경제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결국 유대인 거주지에의 투자 및 이민의 송치를 세계의 유대인 커뮤니티에 일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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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원래 이 계획은 일본 정부내에서도 소수의 인사 및 군당국(그들은 만주국에 주민이 정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또 동 지역에 대한 일본의 산업 및 인프라의 구축을 지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룹내의 아이디어였다. 이 그룹의 주된 멤버는 "유대 전문가"로 알려진 육군 대령 야스에 노리히로와 해군 대령 이누즈카 고레시게,[[닛산 콘체른]]의 총수 [[아이카와 요시스케]] , [[관동군]]의 이른바 "대륙파"(만주 진출을 요구한 다수의 군벌)등이었다.
 
아유카와는 [[1934년]] , 〈독일계 유대인 5만명의 만주 이주 계획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5만명의 독일계 유대인을 만주에 받아 들여서 동시에 유대계 미국 자본을 유치함으로서, 만주개발을 촉진시킴과 동시에, 만주를 소련에 대한 방벽으로 삼는 구상을 입안했다. 관동군내에서 후원자를 얻은 그는 [[1937년]] , 닛폰 산업을 개편하여 [[만주 중공업 개발]]을 설립하고 만주로의 본격적 진출을 완수했다.
 
[[그림:JacobSchiff.jpg|thumb|180 px|right|제이 코브·시프. 유대인 경제력의 상징으로서 정부 수뇌는 인식하고 있었다]]
만주국에 유대인을 이주시킨다는 그들의 구상은 유대인이 많은 자금이나 정치 권력, 및 그것들을 획득하는 초자연적이라고도 표현해야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계 유대인출신의 미국인 은행가[[제이 코브 시프]] (Jacob Henry Schiff)를 기억하고 있었다. 30년전, 쿤 로브 상사([[w:en:Kuhn, Loeb & Co. | Kuhn, Loeb & Co. ]] )를 인솔하는 그가 일본 정부에 제시한 거액의 투자로 인해 일본은 [[러일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전비의 약 40%를 그가 조달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시온 현자의 의정서]]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의 기술내용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고 있었다. [[189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개최된, 제1회 유대 민족주의자 회의의 비밀 회의록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유포된 이 반유대 위서는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지배를 획책하는 국제적인 유대인의 음모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져 위작의 의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에 널리 영향을 주었다. [[알프 레이트 로젠 베르크]](Alfred Rosenberg)도 그 중의 한명 이다. 《[[이십세기의 신화]]》의 저자이며, 나치 독일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알려진 그는 1923년에 동서의 해설서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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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 일본은[[러시아 혁명]]의 진압을 위해 [[시베리아 침공]]을 실시하고,[[적군]]과 적대하고 있던 [[백군]]을 지원했다. 10만명의 병력과 9억엔의 전비를 투입했지만, 3천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 눈에 띈 성과도 없이 1922년에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당시,[[백계 러시아인]] 들의 사이에서는, 혁명은 유대인에 의한 음모이다라는 반유대주의 음모론이 퍼지고 있었다. [[레닌]]을 비롯하여 [[트로트키]],[[카메네프]] ,[[지노비에프]] ,[[스베르드로프]] 등 많은 유대인출신의유대인 출신의 사상가들이 러시아 혁명 지도층에 참여했던 것이 원인이다. 백군은「의정서」의 사본을 병사들에게 배포하여, [[시베리아]]나 만주의 백계 러시아인은 가는 곳마다 [[반유대주의]] 사상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반유대주의 정보를 접한 사람중에는 야스에와 이누즈카, 복어계획의 핵심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시온의정서"의 존재를 알고, 유대 음모론의 세례를 받았다. 1922년에 귀환한 그들은, 유대인에 관하여 많은 보고서를 썼다. 야스에는[[1924년]] , "포황자"라는 필명으로 저술한 〈세계 혁명지이면〉에서, 시온 의정서의 전역을 게재했다. 또[[1928년]]에는 그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이었던위임통치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이주지를 방문하여[[하임 바이트만]] (Chaim Weizmann,[[헤브루 대학]] 창립자), 및 [[벤 구리온]]과 회담한 후, 유대인 정착촌에서 유대인의그들의 근면함을 살펴보고, 유대인의근면함과 힘에 매료되게 되었다매료되었다. 그들은 [[외무성]]이 유대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의 모든[[대사관]] 및 [[영사관]] 의 직원은 그들이 주재하는 나라들의 유대 사회의 동향을 외무성에 계속 보고할 것을 지시받았다. 방대한 보고서가 올려졌지만, 모두 국제적 음모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았다.
 
“유대 전문가”들은 그 후, 소위 “대륙파”와 어느 정도 협력했다. 육군 대령[[이다가키 세이시로]] 및 육군 중령[[이시하라 간지]]가 주도하는 대륙파는 일본으로부터 식민개척자나 자본을 만주에 유치하려고 했지만, 난항을 겪었다. 이것이, 계획자들에게는 복어 계획실행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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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유대인 대회==
[[1937년]] 야스에는 하얼빈에서 현지의 유대인 지도자 아브라함 카우프만(Abraham Kaufman) 등과 회담하고, "일본인은 불공정한 재판에 대하여 반성했다"라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동년 12월 26일, 제1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요제프 카스페 소유의 모데룬 호텔에서 열렸다. 관동군의 인가아래, 3일간의 예정으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육군은 야스에를 비롯하여 당시 하얼빈 육군 특무 기관장을 맡고 있던 육군 소장 [[히구치 기이치로]] 등을 파견했다. 이 자리에서 히구치는 독일의 반유대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참석한 유대인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안 독일 외상[[요아힘 폰 립벤트롭]]은 주일 독일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지만, 상사에 해당되는 관동군 참모장 [[도죠 히데키]]가 히구치를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측도 그 이상의 강경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1938년]] 1월, 관동군은 “유대민족 시책 요령”을 책정하고, 세계 각지의 유대 민족을 "[[팔굉 일우]] 의 대정신에 포옹 통합한다"라고 하는 원대한 목표를 정했다.
 
또 하얼빈에서 유대인 자치구 건설에 관한 구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제2회, 제3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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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만주,중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타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여, 특별히 배척하거나 대우하지 않는다.
# 일본,만주,중국에 입국하려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외국인 출입국관리규칙에 준하여 조치한다.
# 유대인이민을 적극적으로 일본,만주,중국에 유치하는 일은 피하는 대신, 기술이민, 자본이민 등 특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허용한다.
기술이민, 자본이민등 특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허용한다.
 
이 방침은 물론 인도적 정책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일본 및 만주국의 권익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리얼리즘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대미 관계의 악화에 의한 물자 부족과 기술 혁신의 지체에 의해, 만주국 경제는 쇠퇴해 가고 있었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서 유대 자본의 도입을 도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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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1939년]]에 소련이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유럽의 유대인을 소련 경유로 일본에 이송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같은 해,[[제2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되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유대인은 피신하여 그 일부는 이웃나라 [[리투아니아]]로 대피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0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발트 3국]]을 차례로 병합 했고, 이에 따라 탈출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9월에는 일본 정부와 독일이 삼국 방공 협정을 한층 더 발전시켜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그 다음날, 도죠 히데키는 야스에의 대련 특무 기관장직을 박탈하고, 예비역에게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며, 같은 해 12월 개최 예정이던 제4회 극동 유대인 대회를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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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
1942년 6월, [[게슈타포]]의 아시아 지구 사령관으로 주일 독일 대사관 경찰 담당관을 맡고 있던 통칭 "[[바르샤바]]의 백정=학살자" [[요제프 마이 징거]]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정부에 대해, 상하이 유대 난민의 처리를 강요하면서, 이하의 3안을 제시했다.
 
*황포강에 있는 폐선에 유대인을 실어 보내, [[동중국해]]에 흘린 후, 격침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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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히틀러 및 히믈러의 "최종해결계획"을 아시아에 반입했던 것이다. 이 안은 야스에를 경유해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에게 전달되었지만, 정부는 이안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마이 징거의 계획은, 이른바 "상하이 게토"을 형성하는 수준에 머물었다. 상하이의 유태인은 특정지구에 거주하는 것을 강요당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금지되었다.
 
이후 종전 때까지, 유대 난민에게 상황은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되었다. 유대인 지도자중에는, 적국인에 의해서 형무소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 또, 많은 유태인은 기아강태였으며기아상태였으며, 시내의 무선기 파괴를 목표로 하는 연합군기에 의해 종전 수개월 전에 게토가 폭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해방되었다.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