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호아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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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exandre-Eugène Bouët.jpg|섬네일|오른쪽|200px|알렉상드르 외젠 부에 장군 (1833–87)]]
 
부에 장군은 프랑스군과 베트남군인 2,50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수행했다. 프랑스군은 해병대 [[보병]] 3개 대대 (대대장 슈발리에, 라퐁과 루), 해병대 [[포병]] 3개 소대(이스와, 듀퐁, 및 뤼셀), 코친차이나 소총병 4개 중대 및 약 450명에 이르는 황기군 외인부대로 구성되었다.<ref group=Note>Révillon's column included Chevallier's marine infantry battalion, the 1st Annamese Rifle Company (Captain de Beauquesne), 450 Yellow Flags, and two sections of Isoir's battery. Chevallier's battalion consisted of the 25th, 34th and 36th Companies, 1st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s Poulnot, Larivière and Lombard).</ref>
 
공격대는 부대를 셋으로 나눠 진군했다. 레비옹(Révillon) 중령이 지휘하는 좌군은 코친차이나 소총병 대대와 포병 2개 소대로 구성된 해병대 보병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황기군 외인부대와 함께 진군했다. 부에 총사령관의 참모장인 폴 코로나(Paul Coronnat) 대대장이 지휘하는 중군은 코친차이나 소총병과 해병대 포병의 지원을 받는 해병대 보병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group=Note>Coronnat's column included Lafont's marine infantry battalion, the 3rd Annamese Rifle Company (Captain Berger) and Dupont's battery. Lafont's battalion consisted of the 26th, 29th and 33rd Companies, 2nd Marine Infantry Regiment (Lieutenant Goldschoen and Captains Jay and Trilha).</ref> 비쇼(Bichot) 대령이 지휘하는 우군은 보병대대와 코친차이나 소총 중대와 해병대 포병의 지원을 받는 해병대 보병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group=Note>Bichot's column included Roux's marine infantry battalion, the 4th Annamese Rifle Company (Captain Serre de Bazaugour) and Roussel's battery. Roux's battalion consisted of the 25th, 26th and 30th Companies, 4th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s Drouin, Taccoën and Martellière).</ref> 우측면이 홍강을 끼게 되는 비쇼의 부대는 모렐 볼류 함장이 지휘하는 통킹 선단 소속의 포함(플루비에, 레오파, 팡파르, 에클레르, 무스크통, 토롬베)의 지원을 받았다. 부에 장군 자신은 소규모 예비군을 거느리고 레비옹 부대 뒤에서 행진했다.<ref group=Note>Bouët's reserve consisted of the 21st Company, 3rd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 Buquet), the 2nd Annamese Rifle Company (Captain Boutet) and an artillery section (2nd Lieutenant Simon).</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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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
[[파일:Tonkin marsouin.png|섬네일|오른쪽|200px|통킹의 프랑스 해병대 보병, 1883]]
레비옹의 좌군은 흑기군 [[우익]] 전열을 성공적으로 요격하지 못했고, 그 대가로 유영복과 흑기군 대군에 의해 반격을 당했다. 탄약이 부족해지자 프랑스는 꺼우저이(紙橋)로 퇴각했다. 그들의 퇴각은 거의 궤멸로 이어졌고, 부대와 동행한 베트남인 [[쿨리]]는 공황상태로 뒤쪽으로 몰려갔으며, 탄약이 보급되는 제방로를 막았다. 그러나 봉 마을의 대피소에서 사격을 하던 슈발리에의 해병대 보병 대대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엄호했으며, 방어선을 떠나 야외로 나온 흑기군 부대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했다. 밤이 되자 부에는 예비 병력을 보내, 레비옹이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게 했다. 다른 두 부대의 진행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부에는 당일 저녁 레비옹의 부대에게 하노이로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파일:Bichot at Quatre Colonnes.jpg|섬네일|왼쪽|330px|사주묘에 버려진 흑기군 대포를 뇌획하는 비쇼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