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9 바이트 추가됨 ,  11년 전
이 부분의 내용은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기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였다. 한학자이며 민족주의 역사학자역사학자인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현재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역사학자 대부분의 해석이다.
 
나아가 이후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 (역사학자)|이진희]]가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하였고,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