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설플래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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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플래드는 잉글랜드의 바이킹 침략이 절정에 달하던 870년경에 [[웨식스 왕국]]의 [[앨프레드 대왕]]과 에알스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878년까지 영국의 대부분은 덴마크 바이킹 통치하에 있었다.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이스트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는 정복되었고 [[머시아]]는 잉글랜드와 바이킹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그러나 878년 애설플레드의 아버지인 [[앨프레드 대왕|앨프레드]]가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머시아의 서부 절반은 앨프레드의 지배를 인정한 머시아인의 군주 애설레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앨프레드는 바이킹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모든 영국인을 통치한다고 주장하면서 [[앵글로색슨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내걸었다. 880년대 중반 앨프레드는 애설플래드와 [[애설레드 (머시아)|애설레드]]의 혼인을 성사시킴으로써 [[이교도 대군세]]에서 살아남은 앵글로색슨 왕국들 간의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애설레드는 애설플래드의 형제이자 미래에 [[웨식스 국왕]]으로 즉위할 [[에드워드 장형왕]]과 함께 890년대에 새로이 바이킹 공격에 맞서 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설레드와 애설플래드는 [[우스터]]를 강화했고, 머시아 교회에 아낌없는 기부를 하고 [[글로스터]]에 새로운 성당을 세웠다. 애설레드의 건강은 아마도 10년 후에 나빠졌으며, 그 후 애설플래드는 주로 [[머시아]] 정부를 책임졌을 것이다. 애설플래드의 동생인 에드워드는 899년에 아버지인 [[앨프레드 대왕]]이 죽자 [[앵글로색슨인의 왕]]이 되었고, 909년에 웨식스와 머시아 군대를 보내 북부 [[데인로]]를 습격했다. 그들은 [[노섬브리아]] 왕실 성자 오스왈드의 유골과 함께 돌아왔다. 애설레드는 911년 죽었고 애설플래드는 머시아의머시아인의 여주로서 머시아를 통치했다. 머시아에서의 여성 통치자의 즉위는 역사가 이안 워커에 의해 "초기 중세 역사상 가장 독특한 사건 중 하나"로 묘사된다.
 
애설플래드의 아버지 [[앨프레드 대왕]]은 강화된 부르흐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910년대 에드워드와 애설플래드는 부르흐를 확장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녀가 방어 시설을 구축한 마을로는 웬즈베리, 브릿지노스, [[탬워스|톰둔]], [[스태포드]], 워리크, 처베리 및 룬콘 등이 있다. 917년에 그녀는 [[데인로]]의 5개 자치구 중 첫번째였던 더비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팀 클락손은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그녀의 가장 큰 승리"로 묘사했다. 918년 [[레스터|레데세스트레]]는 전투없이 애설플레드에게 항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르비크]]의 바이킹 지도자들은 그녀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그녀는 918년 6월 12일에 사망했다. 애설플래드의 딸 [[앨프윈]]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몇 달 뒤 12월 에드워드는 앨프윈을 [[웨식스]]로 데려오고 [[머시아]]를 직접 통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