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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2=[[딱신|보로마라차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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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타엿파쭐라록 대왕''' ({{llang|th|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Rama I, [[1737년]] [[3월 20일]] - [[1809년]] [[9월 7일]]) 는 [[태국]]의 현 왕조인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로, 초대 국왕 (재위 [[1782년]] - [[1809년]]) '''라마 1세'''로 정식 명칭은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모루라차 마하짜끄리보롬낫 프라풋타엿파쭐라록''' ({{llang|th|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โมรุราชามหาจักรีบรมนารถ พระ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이다.
 
본명은 '''쨔오프라야짜끄리'''이며, [[딱신]] 왕의 장군으로 전쟁의 공적이 많았다. [[역성혁명]]을 일으켜 [[톤부리 왕조]]의 피아딱신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수도를 [[방콕]]에 정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조를 튼튼히 하였으며, 과거의 법전을 수집·개정하여 새로운 법전을 편찬해 내기도 하였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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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끄리 왕조 ==
[[파일:Watpkaeoramakien0605.jpg|섬네일|왼쪽|230px|[[방콕 왕궁]]에 있는 라마끼엔 벽화]]
톤부리 왕조의 딱신 왕은 말년에 정신착란을 일으켰으며, 차오프라야 (라마 1세) 는 국내의 혼란을 두려워하여, [[캄보디아]] 원정을 중단하고 톤부리로 돌아와 역성혁명을 일으켜 [[딱신 대왕]]을 폐위, 처형했다. 이후, 차오프라야는 왕위에 올랐다. 태국의 역사서에서는 차오프라야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나온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로 바꿨으며, 버마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를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 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인 동쪽에 방콕 (정확하게는 끄룽텝) 을 건설하여 천도 한 후, 짜끄리 왕조를 창설했다. 아유타야 왕조의 신권정치를 계승했다.
 
== 문학 ==
출라로께 왕 (라마 1세) 은 즉위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버마 침공군을 몰아내고, 국내를 안정시켰다. 국내가 안정되자, 《삼표법》 을 제정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유타야 왕조의 후예인 것을 강조하고자 많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버마 점령 시대에 사라진 문학 [[라마끼엔]], 이나오를 재편집 했다. 지금도 라마 1세의 라마끼엔은 수많은 라마끼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서 알려져 있다.
 
== 건축물 ==
관광지로 잘 알려진 [[왓 프라깨우]] (에메랄드 사원) 등 많은 사원을 지었다. 이곳에 [[출라롱꼰 왕]] ([[라마 5세]])은 [[라오스]]에서 빼앗은 에메랄드 불상을 설치했다.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건축물은 차오프라야 강 위에 가설된 최초의 대교인 사판 풋 등이 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