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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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자는 [[문일석]], 작곡자는 [[손목인]]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 (1903년)|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목포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고,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ref>{{웹 인용
|출판사=한국방송
|url=http://www.kbs.co.kr/radio/radio_drama/insa/insa_aod/1400930_102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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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은[[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 노랫말을 적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