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디를레방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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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를레방거의 부대 지휘는 계속적인 알코올 남용, 약탈, 가학적인 잔혹행위, 강간, 살인으로 점철되었으나, 상관 베르거는 이를 용인하였으며 "열등인종"과의 싸움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힘러도 그러했다. SS 여단지도자이던 [[오딜로 글로보치니크]]는 힘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지코프의 유대인 수용소를 관리할 훌륭한 인재"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베르거는 "그는 좋은 인간은 아니었으나 좋은 군인이었으며, 다만 술을 끊을 줄을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1942년 2월 그의 부대는 벨라루스 지역의 "도적떼 토벌"(Bandenbekämpfung) 작전에 투입되어 반군과 싸웠다. 그의 부대는 1942년부터 벨라루스에서 젊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고문했으며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Timothy[[티머시 Snyder는스나이더]]는 "디를레방거가 선호하던 방법은 지역 주민들을 헛간 속에 몰아넣고 불을 지른 다음 탈출하려는 사람을 모두 기관총으로 쏘는 것이었다"고 썼다.<ref name = "Snyder">Timothy Snyder,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pp. 241–242, 304</ref> 그는 민간인들을 모아 지뢰밭 위로 행진시킬 인간 방패로 사용하기도 했다. Snyder는스나이더는 그의 특공대가 살해한 벨라루스 민간인이 적어도 3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ref name = "Snyder"/> 힘러는 디를레방거의 평판과 행적을 알고 있었음에도 1943년 12월 콧부스 작전에서 1만 4천 명의 "파르티잔"을 해치운 부대의 성과에 대해 그에게 [[독일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1944년 중반의 [[바그라티온 작전]] 중에 디를레방거의 부대는 적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부대는 급히 재건되고 여단으로 개편되어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 역사가 Martin Windrow에 의하면 1944년 여름 디를레방거는 도살자, 강간범, 약탈자들을 이끌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 작전에 뛰어들었고,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바르샤바에서 디를레방거는 군경과 함께 [[볼라 학살]](Wola massacre)에 가담하여 약 40,000명의 민간인을 잡아 죽였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단 이틀 사이에 죽었다. 같은 볼라 지역에서, 디를레방거는 안에 환자가 있던 3개의 병원을 불살랐고 당시 인기있던 노래인 "In München steht ein Hofbräuhaus"에 맞춰 간호사들을 채찍질, 윤간하고 마침내 의사와 함께 알몸으로 교수형시켰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 그들은 온 구시가지를 누비고 다니며 술을 마시고 나이, 성별이나 민군의 구분 없이 강간, 살인을 저질렀다. 약 30,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구시가에서는 독일군이 야전 병원을 점령하고 부상자 수천 명을 화염방사기로 불태웠다. 바르샤바 봉기 진압 작전의 총사령관이자 디를레방거의 상관이던 SS 장교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렙스키]]는 디를레방거 여단이 "전형적인 용병의 성격"을 가진 부대였다고 표현했다. 디를레방거는 1944년 8월 15일 봉기를 진압하고 시민들에게 엄포를 놓은 공로를 인정받아 SS [[상급지도자]]로 최종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