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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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기구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53세 또는 60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시|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ref>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2403016_002&tabid=k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1442년 3월 16일] </ref>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100대와 파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의 기록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ref>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2405003_002&tabid=k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5월 3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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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