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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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오닌]]ㆍ [[분메이]]의 교토의 대란에 응하여 [[1471년]](분메이 3년)에는, 이와즈에서 안쇼(安祥)로 진출하여 야하기가와 서쪽 평야 지역의 요충이었던 야나다 하리마노카미(梁田播磨守)가 농성하는 [[안쇼 성]]을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고 기책을 써서 쉽게 공략했으며, 또 [[오카자키 성]] 성주 [[사이고 요리쓰구]](西郷頼嗣)를 항복시키고, 그의 딸을 노부미쓰의 다섯 째 아들인 [[마쓰다이라 미쓰시게 (오쿠사 마쓰다이라 가)|미쓰시게]](光重)의 아내로 맞았다. 이 때문에 요리쓰구는 오카자키 성을 미쓰시게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오쿠사(大草)에서 은거했다고 한다.
 
노부미쓰는 적지 않은 나이로 안쇼 성에서 죽지만 자식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 딸 합쳐서 48명의 자식을 얻었다고 전해지며 자신의 딸과 미카와 국 내 여러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마침내 서 미카와 일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또, 그의 서자가 [[다케노야 마쓰다이라 가|다케노야]],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가타하라]], [[오쿠사 마쓰다이라 가|오쿠사]],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나가사와]], [[노미 마쓰다이라 가|노미]](能見), [[고이 마쓰다이라 가|고이]],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후코즈]] 등으로 분립해 훗날 미카와 국 내의 [[누카타 군|누카타]]ㆍ[[호이 군|호이]]ㆍ헤키카이의[[헤키카이 군|헤키카이]]의 3군의 요지에 「[[18 마쓰다이라]](혹은 14 마쓰다이라)」라고 일컫는 일족 여러 가문으로 발전해 가게 된다. 이는 이세 씨와 막부의 지지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지지만 마쓰다이라 씨가 후에 미카와 국을 지배하에 들여,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화하는 기반은 이 노부미쓰의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부미쓰는 [[1451년]]([[호토쿠]] 3년)에는, 이와즈 성 외에 초대 지카우지와 2대 야스치카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신코묘지(信光明寺)를 건립하고, [[1461년]](간쇼 2년)에는 이 해에 죽은 아들 [[마쓰다이라 지카노리|지카노리]](親則)를 위해 묘신인(妙心院, 후의 묘신지妙心寺)를 건립한다. 그 외에도 다키무라(滝村) 반쇼지(万松寺)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 즈음 스스로도 출가하여 법명을 화천입도월당(和泉入道月堂)이라 하고, 자손의 무운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