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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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농 통합 이전까지 선산군 지역의 중심 지역이었던 지금의 선산읍 지역은 통합 당시 25,000여 명이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2만 명 선도 무너졌다. 또한 선산등기소가 구미등기소로 통합된 것<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0207699 대구지법 선산등기소, 구미등기소로 통합된다], 이데일리, 2004년 10월 1일자.</ref>을 비롯해 과거 선산에 있던 기관이 동 지역 시가지로 이전하는 등 상권이 위축되면서 통합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기도 했다.<ref>[http://www4.hankooki.com/NewsPortal/districtNews/200006/np20000618174107he01128.htm “이권 뺏길 수 없다” 소지역주의 기승], 한국일보, 2000년 6월 18일자.</ref> 그러나 이후 시를 주도로 개발 계획이 수립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473213 남유진 구미시장 "녹색·교육·명품 도시 건설하겠다"], CBS 노컷뉴스, 2007년 3월 28일자.</ref>
 
== 역사 ==
현재의 동 지역은 구미 등으로 불리다가, [[경부선]] [[구미역]]의 개설 이후 주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63년]]에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구미시선산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ref> [http://www.klaw.go.kr/CNT2/LawContent/MCNT2Right.jsp?lawseq=2644 경기도남양주시등33개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 (1994년 8월 3일 제정)</ref> [[1995년]] 수출액은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110억 달러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9년]]에 다시 130억 달러 수준을 회복한 뒤 해마다 수출액을 크게 늘려갔으며 [[2003년]]에는 200억 달러 수출을, [[2005년]]에는 3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였다.<ref> 《1998년 구미 통계연보》, 구미시;</br>《2006년 구미 통계연보》, 구미시. </ref> 현재는 [[구미국가산업단지]] 내에 1800여 개의 기업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종사해 시 인구의 주요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림:Oldseonsan.png|thumb|250px|[[대동여지도]]의 선산부·인동현 지역. 서측(좌)으로 지금의 [[김천시]]의 일부인 개령현이 보이며, 남쪽으로 [[금오산성]]을 나타내는 금오(金烏)라는 글자가 보인다. 선산부 옆으로 노란 점이 바로 역참 구미(龜尾)를 말한다.]]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고인돌]]이나 [[삼국 시대]]를 전후로 형성된 고분군이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해동불교의 성지 [[도리사]]를 비롯한 불교 문화와, [[길재]]를 연원으로 하는 이른바 영남학파의 한 축을 담당한 선산 사림의 유교 문화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초에 편찬된 《일선지》(一善誌) 인물조에 실린 인물은 327명으로, 같은 시기에 편찬된 《영가지》(永嘉誌)의 안동의 인물이 163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남지방의 다른 읍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보여준다. 특히 [[고려]]말 이래로 [[길재]], [[김숙자]], [[김종직]], [[하위지]] 등 사림의 주요 인물이 다수 등장하였다. [[이중환]]은 그의 책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ref>《택리지》 권7.</ref>
 
특히 조선 초에는 1만 명이 채 못 된 인구가 [[임진왜란]] 이후 급격히 증가해 [[18세기]]에는 8만 명까지 증가하는 등 [[영남 지방]]의 주요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기도 하였다.<ref>조선 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이며, 18세기의 기록은 해동지도의 기록이다. 양 통계 모두 지금의 구미시를 구성하는 선산도호부 및 인동현의 기록으로, 현재의 시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ref>
 
이러한 특징의 배경으로는 [[낙동강]]과 그 지류가 흘러 형성한 넓은 경지와 자연조건으로 인해 다른 지역과 비교해 많은 사족(士族)들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유입되었고, 이러한 세력들이 토착 세력과 함께 결합하면서 지방에서의 성장 발판을 마련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농경에 적합한 수리적(水理的) 조건으로 농업 생산성이 다른 지방에 비해 높은 것도 이러한 원인의 하나이다.<ref>이태진, 〈조선전기 선산지방의 사회변동과 수전 농업 발달 -일선지 분석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21,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0년, 125쪽.</ref>
 
현재의 동 지역은 구미 등으로 불리다가, [[경부선]] [[구미역]]의 개설 이후 주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63년]]에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ref>[http://www.klaw.go.kr/CNT2/LawContent/MCNT2Right.jsp?lawseq=2791 읍설치에관한법률] (1962년 11월 21일 제정, 법률 1177호)</ref>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된 것과 함께 [[1977년]]에는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관할하는 경상북도구미지구출장소가 설치되어 지금의 동 지역을 형성하였다. [[1978년]]에는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를 설치하면서 양 지역과 구분된 독자적인 권역을 형성하였다.<ref>[http://www.klaw.go.kr/CNT2/LawContent/MCNT2Right.jsp?lawseq=2659 구미시설치및부산시·경상남도간관할구역조정에관한법률] (1977년 12월 19일 제정, 법률 3014호)</ref> [[1995년]]에는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를 설치하고, 구미시선산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ref>[http://www.klaw.go.kr/CNT2/LawContent/MCNT2Right.jsp?lawseq=2644 경기도남양주시등33개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 (1994년 8월 3일 제정, 법률 4774호)</ref> 지금의 구미시가 형성되었다.
 
현재의 동 지역은 구미 등으로 불리다가, [[경부선1995년]] [[구미역]]의도농통합형 개설구미시 이후출범 주요당시에는 중심지로수출액이 부상하였다.92억 달러였으나, [[1963년1997년]]에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구미시선산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ref> [http://www.klaw.go.kr/CNT2/LawContent/MCNT2Right.jsp?lawseq=2644 경기도남양주시등33개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 (1994년 8월 3일 제정)</ref> [[1995년]]120억 달러였던 수출액은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110억 달러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9년]]에 다시 130억 달러 수준을 회복한 뒤 해마다 수출액을 크게 늘려갔으며 [[2003년]]에는 200억 달러 수출을, [[2005년]]에는 3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였다.<ref> 《1998년 구미 통계연보》, 구미시;</br>《2006년 구미 통계연보》, 구미시. </ref> 현재는 [[구미국가산업단지]] 내에 1800여 개의 기업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종사해 시 인구의 주요 축을 담당하고 있다.
 
== 정치·행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