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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경|송방영}}
{{합병|여산 송씨}}
'''[[여산 송씨 밀직공파]]'''는 [[여산 송씨]]의 분파 중 하나이다.
 
'''송방영'''(宋邦英 ? ~ [[1307년]])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상장군]]을 지낸 [[송염]](宋琰)의 아들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여산 송씨]] 밀직공파의 파조.
{{성씨|성씨=여산 송씨(礪山 宋氏)|시조=[[송유익]](宋惟翊)|년도=2000|인구=702,763명|순위=송씨의 37%|인물 = 송상현, 송익필}}
 
==파조==
===송방영===
{{본문|송방영}}
본관 여산(礪山) 6세 밀직공파(密直公派). 고려의 문신. [[상장군]]을 지낸 송염(宋琰)의 아들이다.
1298년([[충렬왕]] 24)에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00년에 [[좌승지|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좌승지]]가 되었다.
1303년에 [[밀직사사]](密直司使)<ref name="밀직사사">[[밀직부사]]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軍事機密) 따위에 관한 일을 보던 관청인 [[밀직사]]의 종2품(從二品) 벼슬로 25대 [[충렬왕]](忠烈王) 1(1275)년에 [[추밀원사]]를 고친 이름이다.</ref>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전왕(前王)인 [[충선왕]]의 귀국을 방해한 죄로 원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해 8월에 귀국하였고, 그해 12월에 동지(冬至)[[밀직사사]]로 다시 하정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5년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원의 황위를 놓고 다투던 중 무종이 즉위하였고, 이때 [[밀직사사]]가 되어 그해 왕이 원나라에 가고자 하므로 따라가려고 하였으나 조적(曺頔)이 왕에게 말하기를, "상국(上國)에게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호종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함으로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주까지 따라가서 함께 가기를 청하여 다만 따로 가는 것을 허락받아 원나라에 가게 되었으나 [[충선왕]]은 무종의 황위 도모를 도운 공적과 그 세력의 힘으로 귀국을 방해하고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서흥후(瑞興侯) 전(琠)에게 개가시키려고 한 죄를 물어 서흥후 전·왕유소(王維紹)·한신(韓愼)·송린(宋璘)·송균(宋均)·김충의(金忠義)·최연(崔涓) 등과 함께 원나라의 서울(大都)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당시의 고려 왕과 관련된 이야기===
 
====[[충렬왕]]의 왕권 강화와 고려의 자주성====
재위 중 자주 원나라에 내왕하면서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의 진흥에 힘썼다.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원에 계속 머물렀던 [[충선왕]]====
충선왕은 본국과 원을 오가며 치정을 하다보니 원으로 해마다 헤아릴 수 없는 물자를 운반하게 함으로써 백성의 폐해가 극심하였다. 또한, 본국 신하들이 귀국 간청을 빈번히 호소하고 또 원나라에서도 귀국 명령을 하였으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후에 충렬왕이 죽고 나서도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원에서 전지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원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전한다.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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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분류:한국의고려 성씨|송,시대 여산_밀직공파사람]]
[[분류:1307년 죽음]]
{{합병|[[분류:여산 송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