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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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오우미야 사건'''(近江屋事件)은 게이오 3년 11월 15일(1867년 12월 10일)에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교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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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으악!! (ぎゃあ!!)”하고 큰소리를 낸 야마다에게 료마는 “ほたえな!(도사 사투리로 ‘떠들지 말라’라는 의미)”라고 말해, 자객에게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게 된다. 자객은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장지문을 열어 방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료마는 이마를 베였다. 료마는 몽롱한 의식 중, 나카오카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하여 나카오카를 “이시카와, 칼은 없는가.”라고 가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료마는 흉부 등 수 군데를 베여 결국 사망. 나카오카는 살아남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2일 후에 구토가 일어난 뒤 사망하였다.
 
== 실행자는 누구인가 ==
당초, 자객이 “こなくそ”라고 이요 사투리(아이치 현에서 사용되는 일본어의 방언)로 이야기 한 점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나 [[오이시 구와지로]]의 짓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오이시는 료마 암살죄로 살해당했다. 또한,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신센구미가 했던 일이나 [[이케다야 사건]]등도 있어, [[보신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신정부군은 신센구미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 졌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아, 아래 적혀있는 [[이마이 노부오]]설 외에도, 전혀 다른 속설인 [[사쓰마 번]]무사 설이나,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원제: 미부기시덴(壬生義士伝))』같은 해석도 있다.
 
또한, 현재 사카모토 료마의 지명도는 나카오카 신타로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서,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배경으로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당시 료마의 지명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오카가 암살범의 목적이며, 료마는 단순히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 ===
[[다이쇼]] 시대가 된 전 [[교토 미마와리구미|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 [[와타나베 아쓰시 (1843년)|와타나베 아쓰시]]의 구술로, [[사사키 다다사부로]]등이 실행범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미마와리구미설이 통설이 되었으며, 여기에 의문을 나타내는 역사하자는 없다. 하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에 어긋나는 부분(자객의 인원구성, 현장에 두고 간 칼집의 소유자 등)이 있어서, 주로 작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설이 나오는 상황이다.<ref>[[2006년]]에 학습연구사(学習研究社)에서 발표한『신 역사군상 시리즈 (4) 유신창세(維新創世) 사카모토 료마』에서는, [[기쿠치 아키라]]가 ‘데라다야 사건 당시에 포박한 한 사람을 살해하여 수배자가 되어, 미마와리구미가 체포하기 위해서였다.’라는 설을 제시하지만, 이 설에 관해서도 앞으로 조사가 필요하다.</ref> 또한 현장에 달려가서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다니 다테키]]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 신센구미 설 ===
료마 암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칼집 등의 물증이나, 3일후에 암살된 [[이토 가시타로]]의 동지([[고료에시]](御陵衛士))등의 증언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에 의해서라고 믿어졌지만, 베인 상처로 보면 [[왼손잡이]]에 의해서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채용하면 왼손잡이에다가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달인인 료마를 살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인물, [[사이토 하지메]]라는 설도 있다.(사이토의 신센구미 복귀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중에서는 고료에시(高台寺党)로써의 사이토 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이토가 왼손잡이라는 설 자체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사건 후, 11월 26일에 막부에서 조사를 받은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관여 된 것을 부정하였다.
 
현재는, 신센구미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 사쓰마 번 음모설 ===
[[대정봉환]] 이후, 료마는 막부에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포함한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 설립에 기울였다고한다. 무력 도막을 지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등이, 이런 료마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었고, 고의로 막부측에 료마의 소재지를 누설했다는 설.
 
요시노부의 처우를 둘러싸고, 사이고와 료마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무력 도막파에 의한 대정봉환파의 암살설은, [[사사키 다몬]]의 서한이나 오우미야 종업원들의 증언등의 자료를 근거로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노선의 대립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강조되었으며, 양자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선은 아니었다는 학설<ref>[[이에치카 요시키]]『막말 정치와 도막운동』(요시카와코 문고(吉川弘文館), [[1995년]])[[다카하시 히데나오]]<‘공의정체파(公議政体派)’와 사쓰마 도막파-왕정복고 쿠테타 재고->(『[[교토 대학]]문학부 연구 기요』41, [[2002년]]) [[사사키 스구루]]『막말정치와 사쓰마 번』(요시카와코 문고, [[2004년]])[[이노우에 이사오 (1940년)|이노우에 이사오]] ‘대정봉환 운동의 형성과정(一)’(『사학 잡지(史学雑誌)』81-11,[[1972년]])등 참고</ref>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이 최대 문제로, 그 점에서 근거가 약하다. 이 설에는 일부 열광적인 지지자기 때문에<ref>막번(幕藩)측에서 그려진 일본 대하 드라마『신센구미!(新選組!)』나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료마가 간다 (竜馬が行く)』에서는 이 설을 기준으로 하여 료마의 암살을 그리고 있다. 시공경찰 PART4(時空警察 PART4)에서도 이 설을 기반으로 하여 료마의 암살범을 해설하는 등 TV, 소설 등에서는 이 설을 많이 채용하고 있고, 보통 이 설을 믿는 사람이 많은 경향이 보인다.</ref>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상대하지 않는 실정<ref>사쓰마 번 음모설이 성립되는 것을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논증하는 점에서 [[기리노 사쿠진]] ‘료마 조난사건의 새로운 시각 - [[가이엔타이]]무사 사사키 다몬의 서한 재검토 - 제 1회, 제 2회, 최종회’(『역사독본(歴史読本)』제 51권 제 10호, 제 51권 제11호, 제 51권 제 12호, [[2006년]])이 있다.</ref>이다.
 
==주석==
<references/>
 
{{토막글|일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