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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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결국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귀족 300명, 성직자 300명, 평민 6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하였다.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을 테니스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서했다. [[3월 24일]] 이 국민의회에는 제3신분에 가까운 많은 [[로마 가톨릭]] [[사제]]-[[근대]] 프랑스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들은 [[교회]]에서 [[민중]]들을 대상으로 사목했기 때문에,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했고,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 경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했다. [[7월 14일]] 아침, [[파리 시|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려놓고 감옥 속으로 쇄도하여 점령했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월 4일]]에 국민의회는[[제헌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26일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국민의회제헌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자, 부인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하여 왕을 파리로 압송해 왔다. [[1791년]]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10월에 입법 의회가 구성되었다. 한편 [[1791년]] 6월에 국왕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다 발각되었다.([[바렌느 사건]])
혁명이 프랑스 밖으로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1792년]]에 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혁명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 초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에게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국왕과 왕족이 프랑스를 배반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국왕일가가 머물고 있던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그들을 감금하였다. 한편 혁명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제1공화정) [[1793년]] 1월에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