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울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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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개인교사였던 그는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정치적 운이 좋았던 그는 곧 모든 업무를 주관하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거머쥐게 된다. 1515년에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총리로서 알맞은 당시 가장 높은 자리였던 [[대법관]]까지 겸임하면서 더 많은 특권을 누렸으며, 자주 alter rex(또 다른 왕)라고까지 불리게 된다. 그가 자신을 위해 지은 궁전([[햄프턴 궁전]])은 나중에 헨리 8세에게 넘겨 주었다.
 
''hi''
==초기 생애==
 
토머스 울지는 잉글랜드 동부에 있는 [[입스위치]] 출신으로 로버트 울지와 조안의 아들이었다. 여러 가지 소문 가운데 그의 아버지가 도살자로 일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로버트 울지가 [[보즈워스필드 전쟁]]의 중요한 희생자로 죽었다는 것이 근거로 지적된다. 로버트는 존경받는 부유한 모직물 상인이었을지도 모르며, 도살자 이야기는 아마도 울지의 품위를 손상시켜 그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지를 알리려고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입스위치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칼리지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498년]] [[3월 10일]], [[말보로]]의 [[사제]]로 [[서품]]받은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존 모턴]]의 개인 사제로 일하다가 [[칼레]]의 통치자인 [[헨리 7세]]를 만나게 된다.
 
울지의 재능을 알아본 칼레 부총독 리처드 낸펀의 추천을 받은 헨리 7세는 울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헨리 7세가 만나서 판단해 볼 때 울지의 강점은 비천한 배경으로 귀족의 힘을 억제하는데 유리하였다. 헨리 7세는 울지를 궁정 예배당의 사제로 임명하였다. 울지는 [[리처드 폭스]]의 서기관의 위치에서 타고난 능력과 헌신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힘든 일을 자청해서 하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09년 헨리 7세가 서거한 후 그는 새로운 왕의 눈에 띄었다.
 
토머스 울지가 비천한 출신에서 두드러지게 출세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높은 지성과 조직 운영 능력, 그의 극도로 부지런한 천성과 왕과 화합하여 정력적으로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야심 덕분으로 보인다. 그의 승진은 새로운 군주 [[헨리 8세]]의 즉위와 들어맞았는데, 그의 정책과 외교적 사고방식은 부왕인 헨리 7세와 성격이 달랐다.
 
울지가 출세할 수 있었던 요인은 헨리가 그의 치세 초반기 동안 꼼꼼한 사소한 일까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7세의 개인적 통치 아래에서 울지는 신용과 책무를 그리 많이 얻지는 않은 듯 보인다. 헨리 7세는 ‘왕실 정부’로 알려진 체계 아래 자신이 직접 나라의 모든 방향을 직접 관리하였으며, 특히 재정에 관해서는 꼼꼼하게 관리하였다. 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튜더가 죽을 때까지 12살이 되도록 [[웨일스 공]]이 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왕좌에 오른 그는 경제 문제와 국내 정세를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과거 자신에게 정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인 울지를 기용하는 데 만족하였다. 1509년, 헨리 8세에 의해 구호금 분배 관리관의 지위에 임명된 울지는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추밀원의 좌석에 앉으면서 헨리와의 관계가 성립되어 그의 윤곽이 떠올랐다.
 
===다른 고문들===
헨리 8세의 첫 번째 고문들은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리처드 폭스|폭스 주교]]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햄]]으로 신중하고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그들은 헨리 8세에게 부왕처럼 신중한 통치자가 될 것을 조언하였다. 헨리는 이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관점과 성향이 있는 사람들로 [[추밀원]]을 새로 채우기 시작했다. 1511년까지 울지는 단호하게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가 프랑스 침공에 대한 열의를 표명하자 그의 태도에 순응함으로써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관점을 실용적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전쟁에 찬동하며 추밀원을 설득하는 연설을 하였다. 프랑스 전쟁에 대한 열의를 공유하지 않았던 워햄과 폭스는 힘을 잃었고 울지는 능란하게 그들의 행로를 가로막았다. 1515년 울지가 지도한 압력을 받은 워햄은 [[대법관]]직을 사임했으며, 헨리는 그 자리에 울지를 대신 앉혔다.
 
울지는 신중하게 다른 고문들의 영향력을 파괴하거나 중립화하도록 노력하였다. 1521년에 그는 지긋지긋한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를 제거하였으며 1537년에는 헨리의 친구인 [[윌리엄 컴프턴]]과 헨리의 전 애인 [[앤 스태퍼드]]를 간통죄로 교회 재판에 기소하였다. 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의 경우, 울지는 그의 호의를 얻으려고 헨리의 누이인 [[프랑스의 왕비 메리 튜더|메리]](프랑스의 미망인 왕비)와 은밀히 결혼한 공작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긴 헨리에게 두 사람을 용서하라고 충고하였다.
 
===교회===
세속에서 울지의 권력이 올라가면서 그에 수반하여 종교적 책무도 늘어갔다. 그는 1511년에 [[윈저, 버크셔|버크셔 주 윈저]]의 [[수도참사회원]]이 된 날과 같은 날에 [[추밀원]]의 의원이 되었다. 1514년에는 링컨의 주교 겸용 요크의 대주교로 승진하였으며, 1515년에는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용되었다. 당시 그가 근무한 요크 대주교의 런던 관저에는 상시 500명의 수하가 있었으며, 런던 서부 햄프턴에 있는 개인 저택인 햄프턴 궁전에는 보좌 역할을 하는 전속 사제만 16명에 전체 하인은 약 4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재력과 권력을 동시에 손에 넣은 그의 주변에는 아첨하고자 몰려든 수많은 귀족과 고관들로 항상 붐비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는 궁핍한 백성을 대상으로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주었으며, 이 때문에 런던의 법률사무소들은 한결같이 벌이가 시원찮았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외교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