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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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멕시코]], 식민지 베라크루스주에서 왕립군대의 부대표 (sub-delegate)로서 복역했었다. 1810년 6월, 그는 [[조아킨 데 아렌돈도]]의 지휘하에 피조 데 베라 크루스 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산타 안나는 폭도와 전투를 하며 멕시코 국내 ([[멕시코의 행정 구역]])의 [[아메리카 토착민|아메리칸 원주민]] 부족들을 감시하면서 다음해를 보냈다. 왕립 군대에 있는 대부분의 크리올로 장교들처럼, 그는 [[스페인]]에 충성을 다했으며 몇년간 [[멕시코 독립 전쟁|멕시코 독립]]에 대한 움직임에 반대하여 싸웠었다. 그는 겨우 16살의 나이로 사관학교 생도가 되었다.
 
== 군대 경력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틸라]] (Miguel Hidalgo y Costilla)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멕시코의 첫번째 시도를 시작한 같은 해, 1810년, 산타 안나는 멕시코의 민족주의자 반란군을 다루는것에 대한 상당을 그에게 가르쳤던, 호아킨 데 아레돈도하에 식민지 스페인 군대에 입대했다. 1811년, 산타 안나는 산 루이스 포토시 주의 라욘지구, 아몰라데라스 마을에서 대령 조아킨 아레돈도 지휘하의 전투동안 [[치치메카족]] 화살에 의해 왼쪽 팔에 상처를 입었다. 1813년, 그는 [[구티에레스-마지 원정]]에 반대하여 [[텍사스]]에서, 그가 용맹함으로 표창받았던 [[메디나 전투]]에서 복무하였다. 1812년 2월에 소위가 되었으며 해가 끝나기 전에 중위가 되었다. 폭동의 결말에서 그 젋은 장교는 아레돈도의 흉포한 역행하는 대량 사살 반군 정책을 목격했으며, 역사가들은 산타 안나가 그의 정책을 모델 삼아서 아레돈도하에서 그의 경험으로 [[텍사스 혁명]]을 지휘했다라고 추측했다.
 
독립을 위한 전쟁이 교착상태에 도달했던, 다음 몇년동안,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 근처 추방당한 시민들을 위하여 마을을 세웠다. 그는 또한 그의 삶을 통틀어 따라다녔던 악습인 [[도박]]을 했다.
 
{{멕시코의 국가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