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 (문질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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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李芮,[[1419년]] ~ [[1480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가성(可成),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이예'''(李芮,[[1419년]] ~ [[1480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가성(可成),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었으며,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1474년 개성 유수가 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왕이 내리는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 당시 부녀자의 재혼문제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예는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양자가 없거나 부모나 존장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시 결혼시킬 경우에는 이를 허락해 주어야 하되 세 번 개가한 자의 자손은 중요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 시대의 재혼에 대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조선 세종|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었으며,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1474년 개성 유수가 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왕이 내리는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예'''(李芮,[[1419년]] ~ [[1480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가성(可成),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었으며,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1474년 개성 유수가 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왕이 내리는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 당시 부녀자의 재혼문제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예는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양자가 없거나 부모나 존장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시 결혼시킬 경우에는 이를 허락해 주어야 하되 세 번 개가한 자의 자손은 중요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 시대의 재혼에 대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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