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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60805481&code=940100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ref name="이정식 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 도미 유학 ===
[[1907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lang|en|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ref>{{언어고리|en}}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ref>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lang|en|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미국 달러|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처단하여저격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스티븐슨 통역을저격사건은 폭력적이며 비인도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을 뿐 만 아니라 장인환과 전명운 등의 강경파 원치세력을 않는다며꺼려하여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ref>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8쪽 참조.</ref>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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