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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허균은 [[1562년]]([[조선 선조|선조]] 2년) [[음력 11월 3일]]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김씨와의강릉김씨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ref>http://blog.naver.com/parkho1001/120007624671</ref>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한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를 한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한다. 허균은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국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었으며,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을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1604년]](선조그러나 37년)에1597년 성균관황해도 전적이도사가 되고,되었으나 수안군수가기생을 되었다.가까이 [[1606년]]에한다는 누이이유로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탄핵을 출간되게받고 된다파면당했다. [[1607년1604년]](선조 40년37년) 삼척부사와성균관 공주목사를전적이 역임하고되고, 《국조시산》을수안군수가 편찬한다되었다. 그해그러나 [[음력불교를 5월믿는다는 6일]]다시 숭불(崇佛)했다탄핵을 하여받아 파직되었으나벼슬에서 얼마 뒤 내자시 정으로 임명되었다사퇴하였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누이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게 된다. [[1607년]](선조 40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내자시 정으로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0년 함열에 유배됐고,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길주에 유배됐다가 다시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ref> {{웹 인용 | url= http://www.hongkildong.or.kr/web2008/sub2/2_sub1.php?Table=2_sub1
|작성일자=
|확인일자 = 2008-10-27 }}
</ref>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ref>http://blog.naver.com/parkho1001/120007624671</ref>
</ref>
 
== 죽음에 대한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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