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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원인= 불확실함 (처형or자살설이 있음.)
|거주지=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국기나라|대한민국}},{{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명= 호 약산(若山)
|학력=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신흥무관학교]],[[황푸군관학교]]
==생애==
=== 의열단 조직 ===
[[경상남도]] [[밀양시|밀양]] 태생이다. [[김약수]]·[[이여성]] 등과 교류하였으며,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후 [[1919년]]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여러 차례 폭력 투쟁폭력항쟁 활동을 벌였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중국 국민당|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고<ref name="p142">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ref>,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그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ref name="p142"/>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남창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에서 자행된 살육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는 [[광저우 봉기광주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조선의용대 조직과 독립운동 ===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pp78">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8페이지</ref>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ref name="pp78"/>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야당 민족혁명당의 당수로서, 여당 당수인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ref name="이우탁">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3페이지</ref>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ref>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ref>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때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ref> {{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꺾쇠표=예|발행일자=2004-4-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 8988410890|장=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1946년 –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출범 |쪽=211}} </ref>
 
귀국한 뒤 김원봉은 조선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그는 이후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ref name="이우탁"/> 그러나 우익과 결별한 후 계속된 시련을 겪게 된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p144">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ref> 김원봉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 비판 ===
학도병 출신으로 중국군이 되었다가 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ref>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ref><ref>[http://www.sasangge.com/serial/jang/detail.html?no=20021019141907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ref>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민필호|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ref name="이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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