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루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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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Image:Battle rocroi.png|left|thumb|left|250px|전투 시작 전 군대 배치]]
전투는 동이튼동이 튼 후에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이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앙의 프랑스 보병대는 스페인군에게 고전하였다. 앙갱의 명령에 반하여 전진하였던 프랑스군의 좌익 기병대 역시 스페인군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장 드 가시옹]](Jean de Gassion) 휘하의 프랑스군 우익 기병대는 자신들이 상대한 스페인 좌익 기병대를 패주시켰다. 앙갱 공작은 기병대의 패주로 인해 노출된 스페인 보병대의 좌익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기병대는 프랑스 기병대와 맞서 반격에 성공하여 이들을 격퇴시켰으나, 프랑스 예비대에게 격퇴 당하였다.
 
앙갱 공작은 기회가 오자 기병 포위작전을 개시하였고, 스페인 군의 후방을 장악하였고 이 와중에 프랑스군 예비대와 교전을 계속하고 있던 스페인 기병대의 배후를 찔렀다. 스페인 기병대는 이로 인해 프랑스 군에게 패주당했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보병대를 놔두고 전장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의 견고한 방진에 두 번이나 격퇴당했고 앙갱 공작은 자신의 포병대와 노획한 스페인의 대포를 이용하여 적군에게 포격을 하여 스페인군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테르시오 진형을 이루고 있던 독일과 왈룬(Walloon)이 궤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은 그들의 사령관가사령관과 함께 전장에서 꿋꿋이 서 있었다. 프랑스군은 이들을 격파하기 위해 4번의 기병돌격을 감행했으나 막강한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의 막강한 진형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사령관인 젊은 앙갱 공작은 스페인 군에게 마치 공성전에서 요새를 지키는 수비병들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항복을 요구했고, 스페인군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두개의 테르시오를 이루고 있던 스페인 군은 깃발과 무구들을 챙기고 전장을 떠났다.
 
스페인군은 사상자, 포로를 합쳐 15,000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프랑스군은 약 4,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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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
[[Image:HeimBattleRocroy.jpg|left|thumb|right|250px|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앙갱 공작]]
이 전투는 [[마자랭]](Mazarin)과 훗날 위대한 [[콩데 공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공작]](Great Condé)이라 불리게 된 앙갱 공작에게 중요한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승리였다. 또 이 전투는 비록 역사가들이 스페인군은 계속되는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으면서도 계속된 기병들의 돌격을 격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멜로의 [[독일]], [[왈룬]], [[이탈리아]] 부대가 사실상 전투 초반에 항복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패했다고 강조한다 하더라도, 근 한 세기동안 스페인이 야전에서 입은 패배중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다. 어떤 경우에서 로크루아는 스페인 군사교리의 우월성이 종결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페인군은 반란으로 인해 지배권을 상실한 [[카탈루냐]]와 이탈리아의 주요 전선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에 대항하는 전역을 벌이는 동안 스페인의 국력은 고갈되어, [[포르투갈]]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부대를 파견하지 못했고,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운동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뒨 전투]](Battle of the Dunes) (이 전투에서 스페인 군은 로크루아 전투의 승리자 [[콩데 공 루이 2세 드 부르봉|앙갱]] 공작의 지휘를 받았다.)에서 스페인이 패한 후에 선형 전술은 확실하게 테르시오를 압도하게 되었고 많은 나라들이 테르시오 대신 선형전술을 채택하게 되었다.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채결되었다. 이 조약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고하게 하였으며 그 시작은 로크루아 전투에서 부터였다전투에서부터였다.
 
 
==미디어에서==
2006년 [[아구스틴 디아즈 야네즈야네스]](Agustín Díaz Yanes)가 감독한 스페인의 영화 ''[[알라트리스테]]''(Alatriste)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에 사용된 배경음악은 장례 행진곡 ''[[라 마르드루가마드루가]]''(La Madrugá)로 아벨 모레노(Abel Moreno)가 세비야의 [[성 주간]](Holy Week)을 위해 작곡한 곡이다. 이 곡은 소리아 9 연대의 군악대가 연주하였는데, 이들은 피의 테르시오(the blood Tercio)라는 별명을, 전투에 참여한 옛 스페인 부대의 계승받았다별명을 계승했다.
 
==박물관==
스페인 보병 사령관 푸엔테스(Fuentes)가 사용하던 가마를 프랑스가 전리품으로 획득하였고 파리에 있는 [[엥발리드앵발리드]](Les Invalides)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푸엔테스는 전투중에전투중 전사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