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설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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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를 지냈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역임하는 등 [[북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렸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을 지내면서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을 주도한 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내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는수상하고 [[1957년]] [[9월]]에는 내각 교육,문화상에 임명되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1962년]] 《문학신문》에 연재하던 시조가 예고 없이 돌연 중단되면서 숙청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이 무렵 [[안막]], [[서만일]], [[신불출]], [[임선규]], [[현덕]], [[박팔양]], [[민병균]] 등 한설야와 가까운 예술인들도 대거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공개 석상에서 서만일을 먼저 공격한 뒤, 한설야가 민병균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를 인용하면서 전면 비판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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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후임|
|전임자 = [[허정숙]]
|후임자 =
|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