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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조선 선조|선조 1년]]) 22세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莩事), 도총(都摠), 도사(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진주 목사 [[양응정]](梁應鼎)이 “자네는 큰 인물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자 그는 이에 양응정을 스스로 모시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은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그가니탕개는 몸소선조 나가서초년부터 그들을6진(六鎭)에 도와자주 싸우니드나들며 공순(恭順)의 위세에뜻을 적은보였으므로 도처에서정부에서 패전하고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 경원부에 침입하고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신립은 중기병(철기병) 500여기를 동원,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여탕개의 1만 군대를 도망갔다물리쳤다. 그는 즉시 [[두만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소탕했다. 500기로 전승의1만 보고가군대를 조정에격파했을 들어가 함경아니라 북병사에 승진되었다.본거지까지 얼마소탕했다는 보고가 니탕개를조정에 죽이고들어가 북병사로함경 오랫동안북병사에 근무하였다승진되었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대간|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시|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 왔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침내 [[탄금대]] 근처에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그러나북방에서 실상철기병을 신립은통해 대승을 거뒀던 기병전의신립이었기 달인으로서때문에,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철기병을 이용하여 일본군를 무찌름으로서무찌를 영원히 기병으로서의있다고 자부심을판단했기 드높이기때문이다. 훈련이 부족한 군대를 활용하려면 사기를 높여야 했기에, 소수의 기병으로 일본의 군세를 돌파하는 것만이 군대의 사기를 높일 뿐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신립은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고, 조령 방어를 포기하게 위함이였다된다. 문제는 그 전투가 치뤄지던 1592년 4월 28일 당일 격전지인 충주의 날씨는 비가 왔다는 것인데 비는 기마전에 매우 불리한 조건이였다. 강을 낀 탄금대에 비가 내리자 땅이 질어져, 파괴력 있는 돌격이 불가능했다. 신립의 선택이 최악의 선택이 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위풍이 대단하였다. 그는고시니 휘하의유키나가는 여러조선의 부대를철기병을 지휘하여무력화 나가시키기 싸워서위해 몸소목책을 쌓고 번이나해자를 적진(敵陣)을파는등 돌파하려대비를 하였으나하였다. 비가적의 와서방어가 땅에단단할 진흙이 많아아니라, 말(馬)이땅까지 움직이는질어 돌격하기 불편한어려운 데다가여건이었지만 적이신립은 휘하의 여러 부대를 손수 지휘하여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강해서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더우기 일본군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10여다수의 명을적을 죽이고베고, 적을 사람이 힘이 다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자결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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