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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구역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청빈하면서도 의절이 강한 가문이었다. 전주 김씨 [[김보현 (1871년)김보현]]에게 시집와 [[김형직]], [[김형록]], [[김형권]], 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등을 두었다.
모진 가난과 고역 속에서도 민족의 절개를 지켜 굳세게 살아 온 한 빈농의 아내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제들에게 “대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훈육하였다 한다. 그의 맏아들인 [[김형직]]이 혁명의 길에 나선 다음부터는 “나라를 찾는 큰일을 하자면 마음을 굳게 먹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혁명활동을 적극 고무해주고 방조해주었다. 손자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자 리보익은 [[일제]] 침략자들이 [[김일성]] 주석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귀순공작에 끌고가 강제동원되었으나 절개와 지조를 잃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일화도 있다.
 
손자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자 리보익은 [[일제]] 침략자들이 [[김일성]] 주석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귀순공작에 끌고가 강제동원되었으나 절개와 지조를 잃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일화도 있다.
 
맏아들 [[김형직]]에 뒤이어 셋째 아들인 [[김형권]]도 혁명투쟁에 나서게 되면서부터 만경대집에는 일제와 그 주구들이 매일같이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벌리면서 별의별 행패를 부렸다. 그는 특히 맏손자인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영도하던 시기에 일제는 어리석게도 [[김일성]] 주석을 체포해 보려는 공작을 펼쳤다. 일제는 당시 항일혁명의 변절자들을 내세워 [[만경대]] 집을 들락거리게 하면서 온갖 유혹을 자행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돈뭉치까지 들고가 [[김보현]]과 리보익 내외를 설득하며 김일성 주석을 체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작하였다.
 
변절자들이 이보익 할머니에게 “…일본제국은 김일성 장군이 산에서 내려오면 일본 관동군 대장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에 나라의 이런 훈령을 받고 할머님을 백두산에 모시고 가서 산에서 고생하는 김일성 장군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라고 간교한 술책을 꾸미자, 할머니는 이들에게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3년 전에 신문에 죽었다는 광고까지 났다는 손자가 살았다니 웬 말인가! 우리 손자를 관동군대장이 아니라 그 할애비를 시킨다 해도 나는 안 가겠다. 내 아들 [[김형직]]이 왜놈에게 죽은 것만해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손자 데리러 못 가겠다.”라고 호령하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소리쳤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그러자 [[일제]]는 할머니를 강제적인 방법으로 중강진과 포평 등 압록강 연안과 중국동북 일대의 험한 산속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박해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그러자 [[일제]]는 할머니를 강제적인 방법으로 중강진과 포평 등 압록강 연안과 중국동북 일대의 험한 산속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박해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고 손자 [[김일성]] 내외가 1945년 [[10월 14일]] 저녁 [[만경대]] 고향집을 찾았을 때 두 팔로 손자를 끌어안고 “… 기어이 돌아왔구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고 “너를 보니 한 생에 쌓인 시름이 다 풀리는구나!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 쓴다더냐! …”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제분들을 생각하며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고 손자 [[김일성]] 내외가 1945년 [[10월 14일]] 저녁 [[만경대]] 고향집을 찾았을 때 두 팔로 손자를 끌어안고 “… 기어이 돌아왔구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고 “너를 보니 한 생에 쌓인 시름이 다 풀리는구나!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 쓴다더냐! …”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제분들을 생각하며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그는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 만경대에서 농사일을 계속하다가 [[1955년]] [[양력]] [[9월 2일]] 남편 [[김보현 (1871년)|김보현]]의 임종을 보고, [[1959년]] [[10월 18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의 묘가 있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ref>http://www.minjoktimes.com/news/news.php?code=33482 </ref>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