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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후금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1627년]](인조 5) 정월 14일 장군 패륵(貝勒 : 왕자) 암니(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假島)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명은 [[의주]](義州)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시|안주]]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조선) |김준]], [[김양언]]을 전사시키고 [[평양]](平壤)을 거쳐 같은 달 25일에는 [[황주군|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피난하였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