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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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차파의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巖과 대응되는 파의(巴衣)는 그대로 현대어의 바위로 유래된 것이 확실하지만 앞의 제차(齊次)의미는 미상으로 확실치 않은데다 孔자와 관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로서는 공암이라는 한자표기만 좇아 "구멍바위"로
== 역사 ==
*원래 [[백제]]땅으로 초기명칭은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다. 초기부터 백제의 세력권이었다.
*[[757년]] [[경덕왕]]
*[[1018년]] [[현종]]9년에 [[수주]](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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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인 [[1414년]] [[태종]]14년에서 2년간 김포현과 통합해 금양현(金陽縣)으로 이름을 붙였다가 재분할 하였다.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현]](縣)제도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통진군]]과 함께 [[김포군]]에 통폐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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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양동면 양화리, 염창리. 목동리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해방후인 [[1963년]]에 서울특별시가
*[[1967년]] 12월 31일에 양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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