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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은 [[급찬]](級飡) [[구리지]]의 아들이며 [[거칠부]]의 증손이다. 그는 청순하고 지기(志氣)가 방정하여 화랑으로 추대되어 1,000여 낭도를 거느렸다. [[562년]](진흥왕 23년)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진흥왕]]에게 대가야를 칠 것을 아뢰어 15세의 어린 나이로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출정하였다. 그는 그 싸움에서 5천 기(騎)를 인솔하고 출전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밭과 포로 가야인 300명을 상으로 받았으나, 밭은 병사에게 나눠주고, 포로는 모두 풀어 주어 자유민이 되게 하였다. 어릴 때 [[무관랑]]과 우정을 맺어 죽음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564년]] 무관랑이 병사하자 7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다.
 
한편 《[[화랑세기]]》필사본에 따르면, 자신의 어머니가 사신(私臣)인 [[무관랑]]과 사통의 관계가 들키자 [[무관랑]]은 주변의 비난을 받게된다. 하지만 사다함은 [[무관랑]]을 불러 "나의 어머니의 죄일뿐 자네의 죄는 아니다'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무관랑]]은 월성을 뛰어 넘던중 구지(九地溝池, 해자)에 떨어져 다리를 다친후 며칠만 후 죽게된다. 이를 원통하게 생각한 사다함은 오열을 하다가 병에 걸려 죽게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죽기 직전 [[풍월주]]의 자리를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 이어받는것이 합당하다며 그를 추천하였다.
 
한편 사다함은 [[미실]]과 정인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을 하게되자 청조가(靑烏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미실은 이 이야기를 남편인 세종에게 말한 후 세종과 관계를 가졌다.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