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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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파일:MarcusAntoniusCVibiusVarus.jpg|thumb|300px|[[데나리우스]] 은화에 새겨진 안토니우스 ([[기원전 42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3년]] 경 – [[기원전 30년]] [[8월 1일]])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로 카이사르 군대 지휘관이자 행정가였고, 카이사르의 사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깨지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불화를 일으켜서 두 진영사이는 내전에 돌입한다. 두 진영이 맞붙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대패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졌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그의 연인이자 함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살했다.
 
== 생애 ==
=== 초기의 생애 ===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은 모두 그와 같은 이름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인데 할아버지는 당대의 유명한 웅변가로 [[기원전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로 복귀했을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벌인 율리아 안토니아였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가 죽자 어린 안토니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로마의 거리를 쏘다니며 방탕한 시절을 보낸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엄청난 빚을 지고 도망하듯 [[그리스]]로 건너가 수사학을 공부했다.
 
[[아테네]]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하다가 [[기원전 57년]]경 [[시리아]]의 [[전직집정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소집한 군대에 들어가 그의 휘하에서 [[유대]]와 [[이집트]]에서 기병대장교로 복무하였다.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용맹하고 대담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이 원정길에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갔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
[[기원전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지휘력으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의 후반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분방한 성품때문에 종종 카이사르를 짜증나게 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그는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보수적인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자 원로원에서 추방당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때 함께 했다. 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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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해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위를 노린다는 협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고 그 혼란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곧 로마로 돌아와 그는 카이사르를 변호하여 그의 암살의 부당함을 로마 시민에 설득시키고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에 그는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카실피나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끈질지게 그에 대해 비난했으며 이에 힘입어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두 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포룸 갈로룸과 무티나에서 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두 명의 집정관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혼자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동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
 
=== 제2차 삼두정치 ===
원로원 공화파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 카이사르파를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자 [[기원전 43년]] 11월초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만났으며 세 사람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어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 (로마)|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두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하여 자살했다. 이로서 카이사르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 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의 속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둘러보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타르수스]]로 불러 그녀의 반란혐의를 조사하고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세번째 부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주동하고 로마를 잠시 장악했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풀비아가 죽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후 두사람은 동방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잠시나마 휴전을 하였다. 이 휴전을 하면서 두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 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았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죽음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상당부분 과장 미화된 점이 없지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와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고 이어 다음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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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권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속에서 자살했고 며칠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카이사리온은 살해 되었다.
 
== 연표 ==
* [[기원전 83년]] — [[로마]]에서 태어남
* [[기원전 54년]]/[[기원전 50년]] — 카이사르의 부하로 갈리아 원정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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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7년]] — 이탈리아에서 혹독한 정치로 정치적으로 소외당함
* [[기원전 44년]] — 첫번째 [[집정관]]직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공동집정관)
* [[기원전 43년]] —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마르쿠스 아일리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 결성
* [[기원전 42년]] —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필리피 전투]]에서 물리침
* [[기원전 41년]] — [[클레오파트라]]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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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Marcus Antonius]]
[[tr:Marcus Antonius]]
[[uk:Антоній Марк Антоній]]
[[vi:Marcus Antonius]]
[[zh:马克·安东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