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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하쳅스키는 [[폴란드]]출신의 귀족 태생으로, 현재의 [[스몰렌스크]] 근방의 알렉산드로프스코예의 집안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드로프스코예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제정러시아]]의 근위부대 중위로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몇 개의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포로수용소에서 훗날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드골]]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탈주 시도 끝에 1917년 성공하여 러시아로 돌아와서 [[볼셰비키]] 당에 가입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던 장교가 드물었던 [[붉은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20대의 나이에 일약 [[모스크바]] 방위사령관, 제5군 사령관이 되어 반혁명군을 분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공산정부에 반항하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런 혁혁한 전과 덕분에 그는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기도 했다.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에서도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지만, [[조젭유제프 필수드스키피우수트스키]]가 이끈 폴란드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때 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스탈린]]과 사이가 나빠졌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훗날까지 계속되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투하쳅스키는 붉은 군대의 총참모장이 되어 구태의연한 오합지졸의 의용군을 전문적인 직업장교 하의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기계화부대와 공군을 육성하는데 큰 역점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급진적인 생각은 "붉은군국주의"로서 스탈린과 그의 친구들이었던 [[보로실로프]]나 [[부됸니]]와 같은 보수파 장교들의 반대를 받았고, 그는 총참모장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점점 국내외의 위협이 증가하자 스탈린은 다시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는 이렇게 현대화된 공군과 기갑부대를 이용한 작전규범인 "[[종심작전이론|종심타격이론]]"을 개발하였다. 이는 독일 기갑군의 아버지였던 [[구데리안]]의 "전격전"(Blitzkrieg)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혹자는 "소련식 전격전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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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교분이 깊었다.
 
==더 읽어보기==
* [[소비에트 연방의 원수]]
* [[모스크바 재판]]
 
==바깥 고리==
*[http://english.mn.ru/english/issue.php?2002-44-12 The links in the chain of death] (Polish historian Professor Pawel Wieczorkiewicz discusses the Red Army purges)
*[http://www.pwhce.org/rus/tukhachevsky.html The Red Bonaparte]
*[http://www.findarticles.com/p/articles/mi_m3955/is_n8_v48/ai_19298461 Tukhachevsky in Leningrad]: A very detailed, neutral source with plenty of references, covering the period 19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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