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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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뤼비오스]]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받았다.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즉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가리켰다.<ref>M.하이켈하임, p.103.</ref>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일컫게 되어 역사적으로 기원전 5,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띄었다. 로마의 정체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되, 다만 귀족 계층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 공화정의 정치 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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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관]]은 민법을 집행하였으며<ref name="Byrd, 32">Byrd, 32</ref> , [[로마 속주|속주]] 군대를 지휘하였다. 5년마다 감찰관 두 명이 선출되어 18개월간 봉직하였다. 인구조사(census)를 할 때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을 등록하거나 쫓아낼 수 있었다.<ref name="Byrd, 26">Byrd, 26</ref> [[조영관]]은 공공 오락 등 로마 도시의 내부 행정을 집행하는 관리였다. [[재무관]]은 보통 로마 시에서는 집정관을, 속주에서는 총독을 보좌하였다. 이들의 직무는 주로 재정 업무였다.
[[호민관]]은 [[로마의 평민|평민]]의 대표자로 여겨졌기에
군사상의 비상 사태시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이 선출되었다.<ref name="Byrd, 24">Byrd, 24</ref>
=== 공화정의 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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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뤼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재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ref>허승일 외, pp.138~141.</ref>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본질적으로 강력한 과두정(oligarchy) 지배 체제였다. 원로원의 경우 엄격한 서열 원칙이 있어
마찬가지로 정무관들도 임기가 짧은데다, 전임 정무관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집단적 지혜와 의사 결정에 의존하였으며, 자신들도 원로원 의원이 되거나 의원 서열이 높아지길 기대했기 때문에 사실상 원로원에서 독립하지 못하였다.<ref name="p.135"/> 따라서 정무관도 과두정을 형성하는 원로원 내의 실세 집정관 출신들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f name="p.135">M.하이켈하임, p.13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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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초기의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 투쟁의 결과 평민은 상당한 권익을 확보하였으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평민의 보호자인 호민관의 경우,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 경력이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새 호민관이 되자 이들은 대개 원로원을 장악한 집정관 귀족들과 손잡기를 바랐고, 결국 실세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ref name="p.135"/>
사실 신분 투쟁 과정에서 귀족은 유력한 평민을 끌어들여 권력을 공유하였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이래 혈통귀족과 유력 평민 출신으로 구성된 신귀족(nobilitas)가 형성되었다.<ref name="k274275"/> 로마의 지배층이 이처럼 신인(新人, novus homo)들을 계속 흡수하면서, 이후 수 세기 동안 로마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에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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