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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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찬(金光燦, 1597~166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 본관은 (신)안동이다. 서예가로 청풍군수, 공조참의,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고 사후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의 출세로 영의정에 증직 추서되었다지냈다. 아버지는 [[김상헌]], 생부는 부사 [[김상관]]이다. 세도가의 직계조상으로, [[영의정]]을 지낸 형제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의 아버지이며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6대조이다.
 
장단부사 증좌찬성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삼촌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인조5년(162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생원(生員)이 되었다. 그뒤 [[음서제도|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세마(洗馬)가 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아버지 [[김상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자결을 기도하였을 때, 만류하지 않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637년[[병자]],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거친 뒤 강화도 통진통진현감(通津縣監)현감, 교하지냈고 1651년 교하현감(交河縣監) 현감 등으로 부임하였다. 1651년 교하현감을 지냈고, 현종 즉위후 아들 [[김수흥]](金壽興)·[[김수항]](壽恒) 형제가 출세하자, 1661년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뒤에 [[청풍군수]]로청풍군수로 부임하였고, 파주목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사후 아들 [[김수흥]]·[[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있다.
서예에 뛰어났고뛰어났으며 부친의 영향으로 동기창체(董其昌體)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예에 뛰어났고 부친의 영향으로 동기창체(董其昌體)에도 조예가 깊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