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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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 ====
산문에 있어서는 [[한유]]의 예를 모방하고, 이른바 고문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취옹정기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 운문[[사 (문학) | 사]] ====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은밀하고 유머러스한 작풍이다. 시는 당나라 후기의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당나라 전성기의 실질적이고 강건한 위풍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서호호(西湖好)라고 지어진 일련의 사는 그 양식의 표준이 되어 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儒學)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와 관련한 대부분을 ‘개인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해이한 것보다는 경직되고 긴장된 것’에, ‘유흥적인 것보다는 건설적인 것’에 무게를 둔다. 틀린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시문을 통해 그를 이해한다면 맞는 말이다. 별다른 배경 없이 상식만을 가지고 구양수를 본다면, 구양수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한 사람을 제삼의 눈으로 보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쉬울 것이 없어도 앞으로는 아쉬울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특히 심리의 저변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에 옆에서 단정 지어 무어라 말할 계제도 아니다.
 
그런데 구양수는 사를 통해서 아쉬운 소리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많은 심정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구양수가 사를 통해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하는 이면의 감정을 상당 부분 노출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배경 때문이었다. 사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가장 유리한 수단이었고, 점차 흥행해 구양수가 살던 시기에는 지체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애용하는 국민 문학의 형식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구양수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계승하고 한유(韓愈)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녀와의 사랑에서 느끼는 세심한 희열과 비애를 사 형식을 빌려 거침없이 쓰는 것이 결격이나 비난의 사유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민망한 내용이나 표현도 적잖게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구양수 문학 세계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망라해 보아야만 하고, 사는 구양수의 문학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고 환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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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 구양수 사선, 홍병혜 역, 2009년, [http://zmanz.blogi.kr/734 지식을만드는지식] ISBN 978-89-6406-357-6
* [[구양수 사선]]
 
{{지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