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문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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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歌詞/歌辭)는 [[조선]]에서 [[시조]]와 함께 유행했던 문학 양식으로, '''가사 문학'''이라고도 부른다.
 
처음에는 가사는 노래로 불렸고 양반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16세기]]의 시인인 [[정철]]의 가사는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사는 [[고구려]]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조선 전기의 가사==
===경기체가의 잔영===
景幾體歌-殘影 고려가사가 악보와 아울러 궁중의 연향가사(宴享歌詞)로 전래해 내려오는 한편, 일반 문인 사회에서는 한림별곡체의 경기체가가 유행하고 안축의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도 권근의 <상대별곡>, 변계량의 <화산별곡>,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이 출현했다. 또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주세붕(周世鵬)의 <도동곡(道東曲)>,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이 창작되었으나, 차츰 붕괴과정을 밟아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권호문(權好文)의 <독락곡(獨樂曲)>을 말기로 하여 경기체가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대신 단가, 즉 시조형에의 접근은 이른바 장가라는 연시조(聯詩調)형과 대치하게 되었다. 물론 이 연시조형은 가사인 <어부사>의 계열을 받은 것이 확실하지만 고답적(高踏的)인 경기체가는 한글의 창제와 새로운 장가형 가사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 기능을 잃고 소멸하고 말았다.<ref name="글로벌 가사 문학"> {{글로벌2|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가사 문학|가사 문학]]}} </ref>
 
===가사의 발생===
歌詞-發生 가사의 발생도 어느 때부터인지 그 시대를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지금까지의 통설은 조선 성종 때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을 그 효시로 삼고, 그 발생도 <상춘곡> 직전으로 추측해 왔다. 대체로 가사의 발생은 우리 문학이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도중에서 생긴 문학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처음 가사의 출현은 창(唱)으로만 전하는 고려가사의 새로운 산문정신에 이끌려 형성된 것이며 모든 국문으로의 창작적 표현이 율문(律文)으로 되었던 그 당시에 단가형의 분장(分章) 형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노래로 읊을 만한 시형(詩形)으로 발전한 것이 이 가사체이다. 정극인은 경기체가도 지었으나 특히 그의 작품으로 후대에 발간된 <상춘곡>은 송강(松江)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과 아울러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까지 분장식 가사체와 경기체가 연시조체(連詩調體)가 다 같이 공존하다가 가사체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각기 자취를 감추고, 가사와 단가인 시조가 두 개의 큰 조류를 이루어 흘러내려오게 되었다.
 
===가사 문학의 발전===
歌詞文學-發展 가사체(歌辭體)의 생성에는 중국의 부체(賦體)인 한시의 영향을 입은 듯하고, 또 경기체가에서 발전, 조선 초에 이르러 <상춘곡>에서 그 전형적인모델을 보였다. 이렇게 <상춘곡>에서 본격적 궤도에 오른 가사문학은 차천로(車天輅)의 <강촌별곡(江村別曲)>, 오세문(吳世文)의 <역대가(歷代歌)>, 송순의 <면앙정가> 등을 거쳐 송강과 후기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에 걸쳐 대성되니 이른바 가사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은 가사계(歌辭界)의 백미를 이루고 있으며, 후기에 이르러 좀 쇠퇴했으나 박인로의 <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독락당(獨樂堂)>·<노계가(蘆溪歌)> 등으로 여전히 가사문학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산문정신과 영합하여 다분히 서사적 수필문학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자나 관료들의 기행과 유배생활을 소재로 한 장편의 출현을 보았고 또 이것이 문학열이 왕성한 평민 또는 부녀들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아 평민가사(平民歌辭)·내방가사(內房歌辭)를 발생케 했다. 그리하여 가사 문학은 마침내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평민·부녀 등의 광범위한 계층에서 그 위세를 떨친 것이다.
 
===정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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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지은 경기체가. <도덕가> 중의 하나로 모두 6장이다. 형식은 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소요부(邵堯夫)·사마공(司馬公)·한위공(韓魏公)·범문정(范文正)에 대한 찬사이다.
 
=== 기타 ===
====독락팔곡(獨樂八曲)====
조선 명종- 성종 때의 학자 권호문(權好文)이 지은 경기체가. 경기체가로서 최후의 작품이며, 권호문의 문집 <송암속집(松巖續集)>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8곡으로 경기체가의 최후 작품인 만큼 기본 음수율이 깨뜨려져 가사에 접근되어 있음.
 
===송순===
{{본문|송순}}
宋純 (1493-1583) 조선 중종-명종 때의 학자.호는 면앙정 또는 기촌(企村).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배이며,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후배로 벼슬은 우참찬에 이름. 뒤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살면서 면앙정을 지어 도서와 시작으로 만년을 보냈다. 문집으로 <기촌집(企村集)>이 있고, 작품으로 한역된 <면앙정가>와 시조로 <황국화가(黃菊花歌)> <치사가> 두 수가 전해옴. 그 중 <황국화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풍상 섯거 틴 날의 잇 갓 퓐 황국화랄 은반의 것거 다마 옥당으로 보내실샤 도리(桃李)야 곳이론양 마라 님의 뜨들 알괘라."
 
====면앙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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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천로===
{{본문|차천로}}
車天輅 (1556-1615) 조선 선조 때의 문신·문장가. 호는 오산(五山).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동방 문사로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문집에 <오산집(五山集)>이 있고 작품에 가사 <강촌별곡>이 있음.
 
====강촌별곡(江村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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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가사==
歌辭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를 정점으로 하던 가사는 한동안 주춤하였다가 소설문학의 자극을 받아 새로운 장편가사로 널리 창작되었다. 원래 가사는 4·4조의 운문으로 그 표현이 자유롭고 또 낭랑(朗朗) 음송(吟誦)할 만하므로 부녀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가사는 잡가와는 달리 양반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숙종 이후에는 장편으로 변모 창작되었다. 이 시대의 작품은 서사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은 역사·설교·교훈·기행 등을 표현했다. 묘사가 사실적이며 날카롭고 능란한 것은 실학·소설 등의 영향과 이 시대의 추세였던 것 같다. 그러나 기록에 이름이 보이는 가사는 허다하지만 실제로 작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선조 무렵에 이루어진 것은 송강·노계 가사 외에도 이원익(李元翼)의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이수광의 <조천록(朝天錄)>, 조위한(趙緯韓)의 <유민탄(流民嘆)>, 임유후(任有後)의 <목동가(牧童歌)> 등의 이름 또는 가사가 유전(流傳)한다. 영·정조시대에 내려와서는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 강응환(姜膺煥)의 <무호가(武豪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나왔다. 정조 때의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순조 때 조성신(趙星臣)의 <개암가(皆岩歌)> <도산별곡(陶山別曲)>, 그리고 정학유(丁學游)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발표되었다. 현종 때의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에는 동학(東學)교주 최수운(崔水雲)의 작이라는 <용담유사(龍潭遺詞)> <교훈가> 등이, 고종 때에는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가 창작되었다. 이 시대의 가사문학은 형식 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져 현실의 율조와 산문적인 내용이 분화됨을 볼 수 있다. 즉 완전히 산문에 가까워지고, 다른 일부는 전통적인 민요 등의 영향으로 창(唱)의 부수적인 창사(唱詞)로 변질된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가사는 <일동장유가> <연행가> <한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가사의 산문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ref name="글로벌 가사의 성행"> {{글로벌2|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가사의 성행|가사의 성행]]}} </ref>
 
===노계의 가사===
蘆溪-歌辭 송강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송강이 문인임에 비하여 일개 무인(武人)으로 가사작품을 남겨 놓은 사람이 노계 박인로이다. 그의 작품은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인 호흡 속에서 창작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임란이 끝나고 부산에 남아 있던 왜병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졸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태평사>, 용진(龍津) 동사제(東莎堤)에 있는 이덕형(李德馨)을 방문했을 때 지은 <사제곡(莎堤曲)>, 누항에 있으나 낙도(樂道)함을 읊은 <누항사(陋巷詞)>, 부산에 수자리가며 지은 <선상탄(船上嘆)>, 이언적(李彦迪)의 옛집을 찾아 지은 <독락당가(獨樂堂歌)>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와 그 밖에 시조 60여 수를 남기고 있다. 그의 가사는 우국애의 발로였고 또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화려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고공가(雇工歌)====
조선 선조 때 작가 미상의 가사. 허전(許▩) 또는 선조가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만조 백관을 머슴에 비유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살림을 상전인 임금의 입장에서 탄식한 것이다.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조선 명종-인조 때의 학자·문인. 호는 오리(梧里). 선조·광해군·인조의 3대에 걸친 명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다. 가사에 <고공답주인가>가 있고,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이 있다. <가곡원류>에 다음 시조 1수가 전한다. "록양이 쳔만자인들 가난 춘풍 매여 두며 탐화 봉뎝인들 디난 고즐 어이하리. 아모리 근원이 듕한들 가난 님을 어이리."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선조 때의 학자·공신인 이원익이 지은 가사. 내용은 <고공가>에 답하는 형식을 빌어 작가가 영의정을 어른 종에 빗대어서 왕인 상전의 말을 듣지 않는 종·머슴들을 꾸짖는 한편, 어른 종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상전을 간한 것이다.
 
====조천록(朝天錄)====
선조-인조 때의 학자 이수광이 지은 가사. 전후 2곡으로 되었다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박인로===
{{본문|박인로}}
朴仁老 (1561-1642) 조선 명종-인조 때의 무신(武臣)·시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무하옹(無何翁). 무과에 급제.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고, 수군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 왜군이 퇴각하자 사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를 지었으며,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벼슬이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고, 뒤에 고향인 노계에 숨어서 독서와 시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은 조국애와 자연애를 바탕으로 시정(詩情)과 우국애가 넘쳐 흐르며, 무인다운 기백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서사적인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작품에 가사로 <태평사>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이 있고 시조에는 <조홍시가>1수, <오륜가>25수, <입암(立巖)> 29수 그 밖의 13수 등 모두 68수가 있는데 대부분이 그의 문집 <노계집>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노계집(盧溪集)====
노계 박인로의 시문집. 원명은 <노계선생문집>. 권3에 <태평사> <독랑당> <영남가> <노계가>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의 가사 7편과 <오륜가>를 포함한 시조 60수가 실려 있다(책 끝에 붙은 <도산가(陶山歌)>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태평사(太平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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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때 박인로가 지은 가사. 내용은 그가 만년에 살던 노계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 문집 <노계집>에 실려 전한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 어린 이 몸은 인자도 아니오 지자도 아니로대, 산수에 벽이 이러 늘글사록 더욱 하니, 져 귀한 삼공과 이 강산을 밧골소냐. 어리미친 이 말을 우으리도 하렷마난 아무리 우어도 나난 됴히 여기노라…"
 
====노계집(盧溪集)= 기타 ===
 
노계 박인로의 시문집. 원명은 <노계선생문집>. 권3에 <태평사> <독랑당> <영남가> <노계가>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의 가사 7편과 <오륜가>를 포함한 시조 60수가 실려 있다(책 끝에 붙은 <도산가(陶山歌)>는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고공가(雇工歌)====
조선 선조 때 작가 미상의 가사. 허전(許▩) 또는 선조가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만조 백관을 머슴에 비유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살림을 상전인 임금의 입장에서 탄식한 것이다.
 
====조천록(朝天錄)====
선조-인조 때의 학자 이수광이 지은 가사. 전후 2곡으로 되었다 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유민탄(流民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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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방가사===
內房歌辭 또한 규중의 여성들에 의하여 여류문학으로서의여류 문학으로서의 가사가 창작되었다. 내방가사는 조선 말 가정에 숨은 부녀의 손으로 지어지고 또 전해진 노래들의 총칭으로 그 수효가 몇십에 이른다. 현재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무명씨의 작이 많고, 선조 때 무옥(巫玉)의 작이라는 <규원가(閨怨歌)>는 대표적인 가사의 하나라 하겠다. 봉건시대의 사슬에 얽매여 규중에 숨어 살던 여성들의 하소연, 슬픔, 그리고 남녀간의 애정, 시집살이의 괴로움, 예의범절, 현모양처의 도리 등 부녀자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양반계급의 부녀자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 많고, 이들은 대개 궁체의 국문으로 두루마리에 적혀 전한다. 대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 가사의 태내에서 내방가사로서 여류 문학으로, 잡가(雜歌)로서 서민문학으로 각기 분화하여 차츰 민요로 흡수되었다.
 
====규원가(閨怨歌)허난설헌====
{{위키문헌|규원가}}
허균(許均)의 첩 무옥(巫玉)이 시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지었다는 내방가사. 내용은 집안에 들어박혀 사는 아낙네의 심경을 하소연한 것으로 가사의 처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엊그제 점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 소년 행락(行樂)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거야 설운 말삼 하자니 목이 멘다."
 
===허난설헌===
{{본문|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 본명은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 허균의 누이로 특히 한시에 뛰어났으며, 올케인 무옥과 함께 가사 <규원가>를 지었고, 시집에 <난설헌시집>이 전한다.
 
=====규원가(閨怨歌)=====
{{위키문헌|규원가}}
허균(許均)의 첩 무옥(巫玉)이 시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지었다는 내방가사. 내용은 집안에 들어박혀 사는 아낙네의 심경을 하소연한 것으로 가사의 처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엊그제 점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 소년 행락(行樂)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거야 설운 말삼 하자니 목이 멘다."
 
====규수상사곡(閨秀相思曲)====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남녀간의 연정을 그린 것으로 그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야 상사 내 마음을 헤아리고 못 보기는 뉘 탓이며, 못 잊기는 무삼 일고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내 청춘 어여쁘다…"
 
====규중행실가(閨中行實歌)====
지은이와 연대 미상의 내방가사. 내용은 여자가 시집가서 행할 도리와 범절을 훈계한 노래. 그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의 흥망 성쇠는 부녀 얻기 달렷니라. 시부모를 호양하여 이웃 사람 칭찬하니, 음식 시비 문안하고 음식 등절 맞기 하소. 의복을 정하기 하고 낯빛을 화하기 하며 한 걸음도 조심하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