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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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욱(金光煜, 1580년~1656년)은 조선 중기의중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고조부는 평양서윤 증이조판서 대제학 번(璠), 증조부는 신천군수 증좌찬성 생해(生海), 조부는 군기시정 증이조판서 원효(元孝), 아버지는 형조참판 증좌찬성 [[김상준]](金尙寯)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현감(縣監) 이천우(李天祐)의 딸이다.
 
1606년 진사시(進士試)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槐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 사서(司書),정언(正言)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正言)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이이첨]]·[[정인홍]]등을 탄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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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副承旨 兼 世子賓客)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고, 1650년 경기감사(京畿監司)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1652년 개성유수(開城留守)에 보임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다. 그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지중추부사겸판의금부사(知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을 역임한후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고 저서로는 ≪죽소집 竹所集≫이 있다. 묘소는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