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펠기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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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기벨은 1933년, 중령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1938년, 소장으로 승진해, 육군 통신 부대의 수장 및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Oberkommando der Wehrmacht) 통신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통신병 대장 (General der Nachrichtentruppe) 으로 승진하였고, 육군 참모장 [[루트비히 베크]] 상급 대장과 그의 후임 [[프란츠 할더]] 상급 대장이 펠기벨을 국방군의 반 (反) 나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는, 그의 전문적 지식을 평가하고 있었으며, 동프로이센의 총통 본부 [[볼프스샨체]] (Wolfsschanze) 의 통신 부문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발키리 작전]]에 가담해 볼프스샨체의 통신회선 절단을 시도하였고, 암살이 미수로 끝나고 히틀러의 생존을 확인하면서, 전화로 베를린의 국내 예비 군사령부에 연락해 총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펠기벨은 암살 미수 당일 체포되어 군적 (軍籍) 이 박탈되었고, 1944년 8월 10일, 인민재판소에서 피의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로부터에게 사형이사형을 선고되었다선고받았다. [[게슈타포]]는 보다 많은 음모 가담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사람들의 처형을 연기하였고, 히틀러는 "음모자들을 즉결 재판에 회부해 신속히 처형하라"는 명령을 했지만, 그의 처형은 연기되어 그 해 9월 4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형무소]] (Strafgefängnis Plötzensee) 에서 집행되었다.
 
==매체에서의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