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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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yril of Alexandria.jpg|300px|right|thumb|성 키릴루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375년]]경 - [[444년]] [[6월 27일]])는 제24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초기 [[그리스도교기독교]]의 교리논쟁이 치열했던 [[5세기]]경에 활약한 신학자이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반박하고 그를 파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모두 그를 [[성인 (종교)|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6월 27일]]과 [[6월 9일]]이다.
 
== 생애 ==
키릴루스는 375년경 [[이집트]]의 테오도시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삼촌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의 대결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테오필루스]]였다. 외삼촌 밑에서 [[수사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을 배웠으며, 덕분에 키릴루스는 [[성경]]을 거의 모두 암송할 정도였다. 외삼촌이 [[412년]]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곧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키릴루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른 그리스도교기독교 종파와 [[유대교]] 및 이교도들과의 투쟁에 나섰다. 특히 그리스도교의기독교의 분파인 [[노바티아누스파]]와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에 앞장섰다. 키릴루스는 과격한 방법으로 [[이단]]과 이교를 단죄했으며, 특히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의 죽음에 키릴루스가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서깊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구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새로 생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촌인 테오필루스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간의 대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점차 부상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긴장감은 [[428년]]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직에 오르자 점차 고조되어 결국 교리논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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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를 통하여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키릴루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했는데, 당시 황제의 누나였던 황후 유도키아와 경쟁하던 [[풀케리아]]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교황 첼레스티노 1세]]와 공모하여 철저히 [[네스토리우스파]]를 공격하려 했으며, 자신과 이견을 보이던 [[안티오키아]]의 주교단이 늦게 도착한 것을 기회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고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키릴루스는 [[444년]]에 죽었으며 후세에 ‘정교성(Orthodoxy)의 방어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교기독교 내부의 교리 논쟁은 지속되었다.
 
== 같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