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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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에고 라이네스]]는 [[카스티야]]의 소귀족(infanzones)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의 사회적 배경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후세의 전승과는 달리 그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외가는 넓은 땅을 가진 귀족 집안이었으며 그는 [[페르난도 1세]]의 궁정에서 나중에 카스티야 왕 [[산초 2세]]로 즉위한 왕자와 함께 자랐다. 산초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1065) 후 22세의 엘 시드를 국왕군 지휘관인 [[국왕 기수]](armiger regis)로 임명했다. 엘 시드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지위에 오른 것은 이때부터 이미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음을 나타낸다. 1067년 그는 산초를 수행하며 [[무어인]]들의 [[사라고사 왕국]] 원정을 떠났고, 사라고사 왕국과의 협상을 주도해 이 왕국을 카스티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페르난도 1세는 죽을 때 여러 자식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면서 둘째 아들 [[알폰소 6세]]에게 [[레온 주 (니키라과)|레온]]을 물려 주었다. 산초는 레온을 합병하기 위해 동생 알폰소 6세와 전쟁을 시작했다(1067). 후세의 전설은 엘 시드가 마지못해 산초의 공격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일을 망설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산초의 레온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알폰소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 원정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엘 시드는 산초가 후사 없이 1072년 사모라를 공격하다 전사하고 알폰소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새 왕은 산초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엘 시드의 충성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엘 시드는 '국왕 기수'의 지위를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엘 시드는 이 사람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음)이라는 유력자에게 빼앗겼고 궁정에서 누렸던 영향력도 자연히 줄어들었지만, 계속 궁정에 남아 있을 수는 있었다. 1074년 7월 그는 아마도 알폰소의 권유로, 왕의 조카딸이자 [[오비에도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레온의 옛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히메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도 알모라비데인들과 싸우다가 [[콘수에그라 전투]](1097)에서 전사했다.
 
히메나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엘 시드의 궁정 내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레온 군주인 알폰소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카스티야 사람들은 엘 시드를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대지주 귀족들이 알폰소 6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엘 시드를 영웅으로 묘사한 전기들은 그를 뻔뻔한 귀족들과 중상 모략에 눈먼 알폰소의 무고한 희생물로 묘사했지만, 엘 시드의 유력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아마 그의 몰락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기민하고 빈틈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궁정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산초의 죽음으로 영향력을 잃은 데 대한 원한 때문에 잠시 자제력을 잃었던 것 같다. 1079년 [[세비야]]를 지배하던 무어인 왕에게 사절로 가 있던 그는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오르도녜스는 그라나다 왕의 세비야 침략을 지원하고 있었다. 엘 시드는 세비야 근처의 카브라에서 훨씬 우세한 [[그라나다]]군을 격파하고 가르시아 오르도녜스를 사로잡았다. 이 승리가 그에게는 몰락의 첫걸음이었다. 1081년 그가 알폰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무어인의 왕국 [[톨레도]]를 무단으로 공격하자 알폰소 왕은 엘 시드를 카스티야에서 추방했다. 그후 여러 차례 화해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081년 이래 엘 시드는 두번 다시 장기간 알폰소의 영토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