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趙胥一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출처 필요}}
'''오우치 요시타카'''({{ja-y|大内 義隆|おおうち よしたか|오오우치 요시타카}}, [[1507년]] [[12월 18일]] ~ [[1551년]] [[9월 30일]])는 [[스오노쿠니|스오]](周防)국의 [[센고쿠다이묘]]이다. 스오 오우치 가문의 제31대 당주이다. [[오우치 문화]]를 꽃피운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7번째 줄:
에쇼 4년([[1507년]]) 11월 15일, [[스오노쿠니|스오]], [[나가토노쿠니|나가토]] 다이슈인 오우치씨 제30대 도슈 [[오우치 요시오키]]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가토슈고다이의 [[나이토 히로요리]]의 딸이다.
 
다이에 2년([[1522년]]) 성인식을 하고, 다이에 4년([[1524년]])에 [[아키노쿠니|아키]]로 출진한다. 이와쿠니 요코지로부터 이쓰쿠시마 섬으로 들어가 [[스에 오키후사]]와 함께 아키 다케다씨의 사토카나산성을사토카나 산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8월 아마고측으로부터 원군으로 온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해 퇴각한다. 그리고,[[산인 지방|산인]]의 아마고씨와도 교전한다.
 
교로쿠 원년([[1528년]])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는다.
18번째 줄:
덴분 3년([[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씨로부터 이반게하고, 쇼니세력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한다. 그 해 고나라천황의 즉위에 맞쳐 조정에 2천량을 기부하고 다음해 다자이다이니직에 임관되도록 요청한다. 천황은 일단 윤허하지만, 돈으로 관직을 사는 행태에 석연치않아 하루 만에 취소한다.
 
덴분 5년([[1536년]]) 우여곡절끝에 다자이다이니에 임관되어 9월에 히젠 다쿠성에서다쿠 성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쳐, 류조지씨와 함께 쇼니씨를 멸문시킨다. 기타 규슈평정을 대부분 달성하였다. 이때, 류조지가의 본가 도슈 [[류조지 다네미쓰]]를 히젠 슈고다이로 임명한다.
 
덴분 6년([[153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막부 정치에 참가 달라는 요청을 받고 [[교토 시|교토]]로 상경을 시도하지만, 산인을 통일하고 남하하는 아마고씨에 저지당한다. 더욱이 영국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덴분 9년([[1540년]]) 아마고씨에 복속해 있던 [[모리 모토나리]]와 [[아마고 하루히사]]가 요시다코오리산성에서요시다코오리 산성에서 충돌한다.(요시다코오리산성요시다코오리 산성 전투)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스에 다카후사]]를 총대장으로 원군을 보내 아마고군을아마고 군을 격파한다.
 
덴분 10년([[1541년]]) 아키 다케다씨, 도모다씨를 멸문하고 아키까지 세력을 뻗친다.
50번째 줄:
* 학문에서도 고서를 좋아하는 등 복고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오우치가 역대로 본다면, 그러한 경향이 강하고, 결코 부정적 면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 불릴 만큼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정책에 관해서도 보수적이라 사치금지령과 지세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한다. 사찰과 신사의 부흥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이자이다이니로 되자 다이후(막부 또는 다이묘를 가리키는 경어)라 선포한다. 그리고, 가신단의 관위도 다른 센고쿠다이묘와 같이 자기 멋대로 관위를 부여한게 아니라, 조정에 주청해 받은 실제 관위였다. 이와 같이 복고적인 정치형태를 많이 볼 수 있다.
* 중국의 [[명나라]], [[조선]]과 무역을 했고, 더 나가 오우치씨는 관령가문인 호소가와씨와 싸워 명과 조선에대한조선에 대한 무역을 독점한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해 독자적인 오우치판으로 다시 출판한다. 또, 요시타카는 야마구치를 교토풍으로 정비하고, 그리스도교 포교를 허락하는 등, 야심이 풍부하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결코 무능한 무장이 아니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시타카가 신임을 잃은 것은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가가 강력히 밀어붙인 아마고 공격이었고, 그 전투에서 패한 것도 한 원인이라 생각된다.
* 다카후사와 대립한 원인은 문치, 무단파의 대립외에 스에씨가 이전에 횡령한 [[도다이지]]의 옛영지를 반환하도록 했기때문이라 생각된다. 오우치씨는 후다이 가신이 영지를 다스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 영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국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워험했다.
* 말년에 문약한 경향이 있어 바보같은 무장이라는 평이 많치만, 실은 문치파를 중용한 것은 다이묘 자신과 가까운 가신단에 의한 다이묘권력의 강화를 꾀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강화했지만, 군사면은 슈고다이와 호족에 일임했기 때문에, 역으로 슈고다이의 독립성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