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타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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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타 번'''({{llang|ja|与板(與板)藩|요이타한}})은 [[일본]] [[에도 시대]]에 있던 [[일본의 번|번]]으로, [[에치고노쿠니]] [[미시마 군]]에 위치했다. 번청은 [[요이타 진야]]이다.
==역사==
에치고 [[나가오카 번 (에치고노쿠니)|나가오카 번]]의 초대 번주 [[마키노 다다나리]]의 둘째 아들인 [[마키노 야스나리 (1617년)|마키노 야스나리]]가 [[간에이]] 11년([[1634년]]), 미시마 군 요이타의 1만 석 영지를 분할받고 나가오카 번의 [[지번 (역사)|지번]]으로 세운 것이 요이타 번이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의 거점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폐성이 되어 있던 [[요이타 성]]터의 산기슭에 [[진야]]를 설치하고, 이곳을 정청으로 삼아 요이타 인근을 지배했다.
 
2대 번주 [[마키노 야스미치]] 때의 상급 가신들로는 마키노({{lang|ja|牧野}}), 노구치({{lang|ja|野口}}), 가토({{lang|ja|加藤}}), 기마타({{lang|ja|木俣}}), 스와({{lang|ja|諏訪}}), 마키({{lang|ja|真木}}), 이나가키({{lang|ja|稲垣}}), 히라이({{lang|ja|平井}}), 고타니({{lang|ja|甲谷}}), 오가와({{lang|ja|小川}}), 오타({{lang|ja|太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간분]] 7년([[1667년]]) 가로였던 노구치 씨가 돌연 영지를 몰수당하고, 일족이 해고 추방에 처해졌다. 번주 야스미치가 에도 성에서 나올 때 야스미치의 배후 경호를 잘 하지 못한 것이 몰수의 이유였는데, 어린 번주가 징계 처분의 의사를 가졌을 리 만무하고, 아마도 권력투쟁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겐로쿠]] 15년([[1702년]]), 마키노 가문은 [[시나노노쿠니]] [[고모로 번]] 1만 5천 석 영지로 전봉되었다. 당시 번주였던 3대 번주 [[마키노 야스시게]]가 [[쇼군]] [[도쿠가와 쓰냐요시]]의 어머니 [[게이쇼인]]의 친동생인 [[혼조 무네스케]]의 친아들이라는 관계로, 소규모 번이지만 격식이 더 높은 고모로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마키노 가문이 고모로로 옮겨간 이후, 요이타 지방은 4년간 막부령으로 존재하다가, [[이이 가문]]이 [[도토미노쿠니]] [[가케가와 번]]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요이타 번이 다시 생겨났다.
 
==역대 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