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마 혼간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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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sakaCastleM0723.jpg|180px|thumb|right|오사카 성]]
 
[[이시야마 혼간지의혼간지]]의 입지는 [[우에노마치 대지]]의 북단에 있는 언덕으로 그 밑으로는 [[요도가와 강]]과 옛 [[야마토 강]]이 합류하고 있다. [[이시야마 혼간지가혼간지]]가 위치한 부근에는 요도가와 강의 지류와 [[세토나이카이]]의 수운 그리고, [[스미요시 구|스미요시]]와 [[사카이 시 (오사카 부)|사카이]], [[기이노쿠니|기슈]]로 향하는 육상교통의 기점이기도 한 와타나베 나루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혼간지]]는 렌뇨의 처소로부터 점차 확장되어 갔고, 사원 안 마을을 형성해 상공업자등이상공업자 등이 자생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 사원 안 마을이 대지의 나지막한 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고사카(小坂)로 불렸고, 나중에 [[오사카]](大坂)로 불리게되었다. 덧붙여 오사카라는 지명은 [[149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시야마 혼간지에는혼간지]]에는 렌뇨의 처소가 있어서 렌뇨를 숭배하는 신도도 많이 몰려 들었다. 이로 인해 본산으로 있는 [[야마시나 혼간지]]의 권위가 위축되었다. 이것을 우려한 렌뇨의 후계자 [[지쓰뇨]]는 [[1504년]] 이시야마 신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것을「오사카이치란(大坂一乱)」또는 이시야마 신도중에는 [[가와치노쿠니|가와치]]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에「가와치노쿠니사쿠란(河内国錯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532년]] [[야마시나 혼간지가혼간지]]가 롯카쿠씨와 [[법화종]] 신도들에의해신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시야마 혼간지가혼간지]]가 본산으로써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된다. [[센고쿠 시대]]말기에는 성으로도 견줄만큼 견고한 성벽을 둘러 요새화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이시야마 전투]]에서는 사찰 안에서 농성전을 했지만, 전투가 길어지자, [[1580년]] 주지 [[겐뇨]]가 노부나가와 화친한다. 그럼에도 겐뇨의 장남 [[교뇨]]는 [[시모즈마 라이류]]와 함께 농성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오기마치 천왕]]의 칙령에 따른 퇴거를 명받아 [[기이노쿠니|기이]] [[사기노모리 베쓰인]](鷺森別院)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이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는혼간지]]는 화재로 소실된다.
[[1583년]] [[이시야마 혼간지의혼간지]]의 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오사카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덧붙여 사찰 건립이전에는 [[고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관련 사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