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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래의 통설에서는 네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끌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무단파가 참여함)을 위해 움직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네네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친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서군측의 자세를 취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 설의 논거로서 제시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주변의 서군관계자 : [[이시다 미쓰나리|미쓰나리]]의 딸([[다쓰히메]])를 양녀로 키우고 있었으며, 측근인 히가시도노(東殿)는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어머니였다. 일설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어머니 막달레나도 측근이었다 한다. 그에 반해 무단파측 사람은 측근에 한 명도 없었다.
** 서군측이라 여겨지는 행동 : 측근 [[고조스]]가 [[오쓰 성]](大津城) 개성 교섭을 행했으며, 네네의 조카에 해당하는 기노시타 가문 형제들([[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형제들)중 다수가 서군으로 참가해 영지를 몰수당했다. 또한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으며, 동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재보를 숨겨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본슌닛키]](梵瞬日記)》).
** 동군의 여러 장수들과의 관계 : [[본슌닛키]](梵瞬日記)에 따르면, 네네가 [[오사카 성]]을 떠난 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까지 수년간 네네와 무단파 장수들([[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등등.
 
* 《기요마사키》를 보면,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중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하여 일본으로 소환되었을 때, 네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에게 [[가토 기요마사|기요마사]]를 용서하도록 설득했다는 기술이 남아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 사후에도 네네와 [[가토 기요마사|기요마사]]가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가토 기요마사|기요마사]]와는 적잖이 친밀하게 지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네네가 [[이시다 미쓰나리|미쓰나리]]와 아주 친밀했으며 도요토미 가문의 천하가 이어지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절대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다만, 《기요마사키》는 사료적으로 그 내용의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는, 《[[다이코키]](太閤記)》와 같은 일종의 군기물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때, 네네가 자신의 조카・[[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에 가세하도록 설득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또한 네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에야스]]에게 가세하라고 했다며, [[아사노 요시나가]]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히데아키]]를 설득하는 편지가 남아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과는 다르다. 이 편지에는 [[아사노 요시나가|요시나가]]가 “우리들은 고다이인님(=네네)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적혀 있을 뿐이며, 그저 배반을 권유하는 편지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