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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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여론은 핀란드 편이였다. 세계대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 전쟁은 당시 진행되던 유일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침공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 인구는 핀란드에 돌아갔으며 외국에서 많은 수가 핀란드에 가서 지원병으로 싸웠다(나중에 배우로 유명해지는 [[크리스토퍼 리]]도 이때 지원). [[스웨덴]]도 이때만큼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군수품과 현금, 신용, 인도적 지원을 핀란드에 해주었다. 8700명의 스웨덴인 지원병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핀란드군의 독창력과 성공에 대해 때로는 크게 과장되게 보도를 하였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채 안되어 소련의 지도부는 작전 포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월말이 되어서야 핀란드 정부에게 스웨덴 정부를 통해 예비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그때까지 핀란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이 평화 제의 소식이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알려지자 핀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의 동기는 크게 변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주변 자국 영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 "뿐"이었다뿐이었다. 물론 핀란드와 외국의 일반 국민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핀란드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페르 한손]](Per Albin Hansson)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영국군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국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