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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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겐]] 3년/[[랴쿠오]] 원년([[1338년]])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전사한 후, 지카후사는 [[이세노쿠니|이세]](伊勢)에서 [[이세 신궁]]의 신관 [[와타라이 이에유키]](度会家行)의 도움을 받아 남조의 세을 확대한다. 이 무렵 지카후사는 이에유키의 [[신국사상]](神国思想)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된다. 단, 이에유키가 주창하는 [[이세 신토]](伊勢神道)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간토]](関東)에서 남조 세를 확대하기위해 [[유키 무네히로]](結城宗広)와 함께 노리요시 친왕, [[무네요시 친왕]](宗良親王)을 받들어 간토로 건너갔다. 하지만, 해로를 통해 건너갔기 때문에 도중의 폭풍우를 만나 두 친왕과 헤어진 후, 혼자 [[히타치노쿠니|히타치 국]](常陸国)에 상륙한다. 히타치에 상륙한 후, [[오다 하루히사]](小田治久)를 의지해 [[진구지 성]](神宮寺城)에 머물지만, 북조측에 가담한 사타케 가문(佐竹氏)의 공격을 받고, 오다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 성]](小田城; 현 [[쓰쿠바 시]](つくば市))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카후사는 [[무쓰 국]] [[시라카와 시|시라카와]](白河)의 [[유키 지카토모]](結城親朝)를 비롯 간토 각지의 반막부세를 규합한다.《[[신황정통기]]》,《[[직원초]](職源鈔)》의 집필을 한 시기가 이 무렵이라고 한다. [[고코쿠]] 원년/랴쿠오 3년([[1340년]]) 북조의 [[고 모로후유]](高師冬)가 간토 통치를 위해 파견되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소원해진 오다 가문을 벗어나 [[세키 무네스케]](関宗祐)의 [[세키 성]](関城)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이호 성]](大宝城)의 시모쓰마 가문(下妻氏)과 [[이사 성]](伊佐城)의 이사 가문(伊佐氏) 등과 연대하여 히타치 서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히타치에서의 5년의 시간이 지나자, 남조의 관백 [[고노에 쓰네타다]](近衛経忠)가 [[도시초자|후지와라씨의 수장]]({{lang|ja|藤氏長者}})으로 후지와라 씨계 무사단을 독자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게는 적과 내부의 내홍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고코쿠 4년/[[고에이 (연호)|고에이]] 2년([[1343년]]) 다이호 성과 이사 성이 함락되자 요시노로 귀환하였다.
 
[[쇼헤이]] 3년/[[조와 (1345년)|조와]] 4년([[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四條畷の戦い)에서 [[구스노키 마사쓰라]](楠木正行)의 남조 세력이 [[고 모로나오]](高師直)의 북조 세력에 패배하자, 요시노로부터 [[고조 시|아노]](賀名生)로 천도했다.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한 후, [[고무라카미 천황]]을 보좌하였고,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불리는 아시카가 가문의 내분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남조에 항복하였다. 이를 [[간노의 소란#쇼헤이 일통|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잠시나마 [[교토 시|교토]]와 [[가마쿠라 시|가마쿠라]]를 탈환하였다. 쇼헤이 9년/[[분나]] 3년([[1354년]]) 음력 5월 10일 아노에서 임종했다. 지카후사 사후, 남조에는 지도적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고, 남조는 서서히 북조측으로 기울어져 [[1392년]] 전국은 북조에 의해 통일되었다.
 
[[오사카 시]] [[아베노 구]]의 [[아베노 신사]](阿部野神社)와 [[후쿠시마 현]] [[다테 시 (후쿠시마 현)|다테 시]]의 [[료젠 신사]](霊山神社)에서는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함께 제를 지내고 있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