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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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코 3년/[[쇼쿄]] 2년([[1333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활약으로 전국 각지에서 막부 타도의 움직이 확산되어갔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円心) 등이 거병해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였다([[겐코의 난]](元弘の乱)).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 시|교토]]로 개선할 때, 마사시게는 [[효고 현|효고]](兵庫)까지 나가 마중하였고, 경호를 맡았다.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 시작되자, 마사시게는 가와치, 이즈미 [[슈고]](守護) 등의 관직에 올랐고,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또 [[유키 지카미쓰]](結城親光),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와 더불어《[[산보쿠잇소]](三木一草)》라 칭하여 조정은 그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겐무]] 원년([[1334년]]) 겨울,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호조 가문의 잔당 토벌을 위해 교토를 떠난 직후, [[모리나가 친왕이친왕]]이 모반의 혐의로 추포되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인도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사시게는 다수의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이 점으로 보아 마사시게는 [[모리나가 친왕의친왕]]의 조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겐무 2년([[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난을 진압하러 출정하였고, 곧 [[고다이고 천황]]을 이반하였다. 이 일로 조정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다카우지]] 토벌을 명하였고, 요시사다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箱根・竹ノ下の戦い)에서 패배하여 아시카가 군의 교토 진격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다행히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가 [[오슈]]로부터 교토로 진군해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아시카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다.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규슈]]에서 세를 수습하여 다시금 교토로 진격해 오자,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 [[닛타 요시사다]]를 내쳐 다카우지와의 화친을 전언하였다. 하지만, 용인되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천황에게 교토에서의 철군을 진언하지만, 이마저도 묵살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닛타 요시사다]]의 휘하 장수로 출진하여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군에 패해 자결하였다. 이때 동생 [[구스노키 마사스에]]와 함께 자결하였다고 한다.